서울, 아니 우리나라 사교육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D동의 영재교육으로 유명하다는 학원 이름과 전화번호를 들고 와서, 진로 상담을 해달라고 아들이 내게 요청한 건 5월 말이었다. 일단 전화는 해봤다. 어차피 학원에서는 늦었다는 둥 하면서 애 흠잡고, 엄마 불안하게 할 것 뻔하다. 내가 학원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번도 선행을 한적 없다는 말에 저쪽에서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요즘 이런 엄마가 어디 있나 싶었나 보다.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중학교 선행을 다 하고 와야 한다는 정도의 상담과 입시 설명회 카톡을 보내준다. 이후 동네 학원 상담을 하고 있는데 한 시간쯤 후에 다시 그 학원에서 전화가 온다. 애가 하려고 할 때 진도를 나가야 한다면서 수학과 과학 진도 팁을 상세히 알려준다. D동 사교육이 공연한 헛소문은 아니구나 감탄하며 듣는다. 상담 시점부터 중학교 수학, 화학, 물리의 전 과정을 끝내고 오면-그것도 심화 버전으로- 7월 18일 개강반에 넣어준다고 한다.
애가 그 반에 꼭 들어가겠단다. 계산해보니 하루에 한 단원 진도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심화 버전 문제집을 하루에 한 단원씩 풀어야 그 진도를 잡는다. 주말에는 물리와 화학 한 단원씩 나가서 총 5주에 걸쳐 완성해오라고 한다. 강남 어떤 학원에 가기 위해 과외를 한다는 얘기를 뉴스에서 본 적은 있어도 내 아들이 그걸 하겠다고, 뉴스에 나온 엄마 역할을 내가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뉴스 보면서 혀를 끌끌 차던 나였는데 말이다. 선행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아들이 이걸 기어이하겠다고 하는데 일단 계획은 짜 본다.
"이건 중1이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진도야. 만일 네가 이걸 해내서 그 학원 테스트에 통과한다면 넌 영재가 맞는 거고, 이걸 못하면 정상이야. 따라서 해내면 잘한 거고 못하면 정상이니, 최선을 다하되 안 된다고 좌절하진 마."
시일이 급하니 일단 5월 30일부터 인강으로 진도를 한 단원씩 나가고 있다. 아직까지 진도는 잘 나가고는 있는데, 체력전에서 매일 부대낀다. 안 그래도 움직이는 거 싫어하고 몸으로 하는 거 싫어서 공부한다는 애이다. 열네 살밖에 안 된 아들을 저질체력으로 키워놨으니 내가 이점은 정말 속이 상하다. 아침 일어나는 것부터 전쟁이다. 깨우는 내게 성질부리는 것도 모자라 정한 시간보다 일찍 깨운다고 따지고 드는 아들을 보며 이게 뭔 짓인지 싶어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길 수차례.
"엄마들이 대부분 하는 말 중 '나 위해 하는 공부니? 너 좋으라고 하는 공부잖니!'라고 말하는 거 다 거짓말이야. 너 공부 잘해서 원하는 꿈 이루면 일단 네가 제일 좋겠지. 그렇지만 엄마도 좋아. 다들 애들 공부 잘해서 명문 학교에 진학하면 그 엄마가 애를 잘 키웠다고 온 대한민국이 부러워하고 엄마들 사이에서 워너비가 되잖니? 애 공부 잘하면 엄마가 애 다음으로 그 영광의 수혜자가 되는 것도 맞아. 따라서 네가 공부 잘하면 내가 너 다음으로 좋은 거 사실이라고. 그런데 아침마다 이런 수모를 겪어가면서 바라지하고 네가 공부를 잘 한들, 이게 정말 너나 나를 위한 게 맞는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야. 매일 아침마다 너랑 이 전쟁을 벌이는 하루하루가 쌓여 묵으면 네가 공부를 잘 한다한들 그게 내게 행복일 수 있을지는 난 잘 모르겠다."
애가 미안하다고 한다. 다음 날부터는 깨울 때 신경질은 안 낸다. 진도는 잘 나가고 있는데 문제는 늘 그렇듯 체력이다. 인강을 듣기만 하지 문제풀이로 다지기 하는 시간을 내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학창 시절 수학을 정말 잘했다. 그 비결은 문제 풀이를 기계처럼 많이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저렇게 인강만 듣는 것으로 진도 나갔다고 하니, 내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부 시간이 부족한데, 애의 체력이 앉아 있는 걸 받쳐주질 못한다. 인강으로 이해는 되고 있는 것 같긴 하나 그게 체화되는 데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체력이 문제이다.
아들을 둘이나 수험생 바라지를 하신 담임목사님의 사모님께 하소연했더니,
"그래서 강남 엄마들이 애들한테 공진단을 먹인다잖아. 그거 먹으면 바로 확 깨니까."
존경하는 선배님이시자 스승님이신 문 선생님의 사부님이 한약사이시다. 너무 비싼 약이라며 경옥고를 권하시는 문 선생님. 당장의 루틴을 만들 때까지만 공진단 먹이고 다 먹으면 경옥고 먹일게요. 했더니 바로 알아들으시고 착한 가격에 공진단을 공수해주신다. 보너스로 소화제까지.
학교 시험도 안 보는 중1인데, 지가 하고 싶다고 저렇게 학원이니 인강이니 하며 공부를 하는데 부모가 돼서 어떻게든 도와줘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단 의지를 지탱할 체력이 안 따라줘서 긴급 처방으로 몸 관리도 해줘야 하고, 인강의 일방성을 보조해줄 질문에 대한 답들도 옆에서 바로바로 해결해주는 과외선생 역할도 해야 하는 고로. 상전도 이런 상전이 따로 없다.
일단 7월 17일까지만 참아보자. 그때까지 얘가 해낸다면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달려야 할 과제가 산재할 테고, 못 해낸다면, 플랜 b와 함께 멘털 관리에 들어가야 한다. 공부 안 하겠다고 버티는 애들이 태반인데 다들 내게 복 받았다고 한다. 이것도 결과가 좋으면 복이겠지만 안 좋으면?
난 결과가 좋든 안 좋든 모두 복이라고 생각한다. 애가 사춘기라는 미명 하에 나와 여태껏 머리 터지게 주고받은 상처를 돌볼 틈도 없이 어떤 목표를 향해 둘이 치열하게 손잡고 달리며 티격태격하는 게 훗날 추억이지 않을까? 내 우울증을 치료한 건 내 아들의 눈앞에 펼쳐진 과제였다. 애가 목표로 하는 진로가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보니 엄마인 나는 울면서 쓰러져있을 수가 없어 다시 일어섰다.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학원과도 상담을 하니 애 공부 바라지라는 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장난 아닌 노가다이다. 원하는 사교육을 받는데 차질이 없도록 돈도 벌어야 하고, 애 공부하는 옆에서 상시 대기를 하면서 공부 상태를 수시로 체크해야 하고, 먹는 것을 비롯한 건강도 관리를 해줘야 하며, 멘털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붕괴가 되는 지점을 예민하게 알아채서 뗌빵을 해줘야 한다.
사람은 살면서 세 종류의 부모를 만나는 것 같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원래 부모인 제1부모, 나랑 가정을 이뤄 애 낳고 키우면서 생기는 공동과제를 해결하며 서로를 키워주는 배우자인 제2 부모, 내가 낳아 키우는 동안 다시 생을 살면서 만나는 문제들을 함께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과정에서 내가 성장하게 하는 자식인 제3 부모. 다들 소소한 차이는 있어도 내가 정체되지 않고 정체감을 가지며 정체성을 획득하는데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큰애의 바라지를 하면서 정신이 몰두돼 있는 사이. 많은 것들이 무뎌진다. 너무 이른 갱년기로 인한 상실감이나 불통 남편으로 인한 갑갑함 모두 "야호~!"가 됐다. 심하게 까발리고, 갈 데까지 가면서 이젠 정말 끝이라며 극한에 도달했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그 때야 비로소 용서가 됐다. 그건 아들이 내게 준 이 빡빡한 과제에 정신 팔린 것도 한몫을 했다.
내게 사랑은 책임감인 것 같다. 미션이 떨어진 것을 함께 해결하면서 정드는 게 사랑인 것 같다. 그래서 내 사랑은 가족을 떠날 수 없는 모양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집단 속에서 주어지는 내 역할을 열정을 다해 완수하는 것. 그게 내 사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