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리는 황홀감과 화나는 현타
<사랑이 지나간 자리>(2015)
<사랑이 지나간 자리>(2015)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영화나 골라잡아 아무 정보도 없이 본 영화였지만 아무렇지는 못 했던. '사랑이 지나간 자리'라는 제목이 주는 무거움을 어느 정도 각오는 해야 한다고는 했지만, 그 무거움이란 게 그런 쪽일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더욱 아련하고 짠했다. 스페인과 기니비사우(아프리카 서부 대서양 연안에 있는 나라) 사이에 있었던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한, 늘 국가간의 아픈 역사에 죽어나는 건 사람이 듯. 이 영화에서도 아픈 역사에 죽어나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최근까지도 있었던 식민지 국가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 인간차별의 실제적 재현이 이 영화가 일반 로맨스물과는 변별되는 가장 큰 장점이었다. 지렁이는 물론 인간은 밟히고 가만 있지 못하는 존재이므로 이런 차별의 불씨는 그 공동체를 모조리 연소시키는 발단이 된다. 어찌보면 이 영화에서 살살 타오르는 주인공의 사랑은 이미 그 불씨에 연소되어 너덜거릴 게 충분히 예상되었고, 보는 이는 이게 어떻게 너덜거릴 건지를 지켜보는 포지션을 취하게 했다. 관음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한편 이 영화는 로맨스에 기대하는 판타지가 너무 과했던 측면도 있었다. 특히 클라렌스와 이니코, 칼리아와 비실라의 갑작스런 감정선이 그랬다. 이니코가 클라렌스에게 춤을 리드했을 때, 바다로 떨어지는 마법같은 폭포수를 보여줄 때, 폭포수가 갑작스런 정사씬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러브라인은 참으로 황홀한 측면이 강했으나 실제로 저런 사람 만나면 어떨까 싶은. 영화니까 가능하지! 폭포수까지 보여준 건 좋지만 그 안에서 옷을 그렇게 벗어던지면 현실에서는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 상황인 거다.
칼리아도 우연히 본 바실라에게 그냥 사랑에 빠진다? 하기야 미녀들에겐 가능한 일이지. 만나보지도 않고 첫눈에 홀딱 반한다는 말은 흔히 들을 수 있는 수기이니. 아쉽게도 난 그 정도의 미녀가 아니다 보니 그런 말은 다 현실감이 없어놔서! 그렇게 첫눈에 반한 그녀를 평생도록 순정을 다하여 한 여자만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살아간다고? 그것도 남자가? 이런 설정은 참 영화를 보는 내게 뒤틀리는 황홀감과 화나는 현타를 경험케 한다.
글쎄...
난 남자의 순정을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표현해놓으면 공감이 안 된다. 남편이래도 크게 예외는 아니다. 어떤 남성도 한 여자를 위해 저렇게까지 자기 희생을 감수하며 평생 한 여자만 맘 속에 간직하며 살 순 없다고 본다. 그런 남자 없으니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거 보고 대리만족이나 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어쩌면 난 일찍이 이 부분을 깨닫고 포기할 걸 진작에 내려놓았기 때문에 남자에게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어서 결혼 생활이 무탈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현실은 그렇다고 해도 영화에서 이런 남자를 보면 설레고 아쉬운 건 사실. 사랑을 두고 상상하는 환타지가 비록 현실적이진 못해도 늘 아쉬운 채로 어딘가에 남아있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잔존 감정같이. 환타지를 사랑으로 알고 그게 충족이 안 되니 상대방을 몰아세우다가 결별했던 옛사랑들에 대한 미움들에게서 얻은 결론이, "그런 사랑은 없다."였겠고, 그걸 깨달은 후 만난 남편에게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기에 무난하게 결혼해서 지금까지의 삶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줄은 내 스스로 가장 잘 안다.
그러나...
가끔 그런 남편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특히 이런 영화 보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로 너무 쉽게 타협하며 살아왔던 내 스스로는, 현실을 즉시한 현명함일까, 여자이기를 일찌감치 포기했던 나약함일까?세상에 어떤 여자가 자기 남자한테 아무렇지도 않고 싶겠으며, 사철발벗은 아내가 되고 싶을까? 영화에서처럼 누군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도록 알알히 박힌 단 하나의 사랑으로 남는 사랑이란 진작 영화에서나 가능한 걸까?
역으로...
내게는 그런 사랑이 있는가? 이 부분에서 할 말 없군. 한 때 절절했던 사랑들은 시간에 다 묻히고 잊히기 마련. 지금의 사랑은 우리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너무 과도한 과제를 함께 해치우느라 절절할 틈이 없고. 그러니, 내가 못하는 사랑은 상대방도 못한다고 봐야 맞는 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라고. 내가 그리 애타게 혹은 뜨겁게 단 하나의 사랑이라 맘 속에 박제할 힘도 열정도 없으면서 상대에게 뭘 바라며 이런 영화 볼 때마다 신경질을 부리는지!
그래서...
로맨스를 다룬 영화는 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앞으로 멜로는 좀 갈라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