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온다 하기
남은 700여 걸음 못다 걷고
들어앉았는데
비가 안 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걸을 걸.
하루 오천걸음 걷는 게
원래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어?
설핏 잠이 들었다가
잠시 깼는데
한 학생이 기말고사 문제의 답으로
메일 상담이 온다.
내일은 오전엔 계절학기 수업
오후엔 병원 예약
늦은 오후나 돼야
집에 올 듯한데
내 정신으로는
그동안 혹시 잊어버릴 수도 있을 듯하여
가능하다면 지금 전화 달라는 시간은
새벽 두 시.
근 이십 년을 대학에서 강의했지만
새벽 두 시에
학생 질문 상담하긴 처음.
새벽 두 시에는
학생은 물론
가족과도 전화통화는 안 하지.
학생도 나도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이한 체험.
점점 내 기억력에 대한 자신이 없어진다.
내 뇌에 대해 점점 불신한다.
사소한 에피소드 기억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하지만
중요한 일 관련된 것을 실기하여 손해 봤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맘이 편하다.
그래도 새벽 두 시에 상담은 과했다.
그래도 학생입장에선 기말시험 관련된 거고
이 새벽에 메일을 보냈다면
내심 다급했을 터.
내가 자고 있다면 모를까.
내가 확인하고 바로 해결할 수 있는 걸 갖고 시간 끌면
학생 애만 닳지 싶어
잘한 것 같기도.
두 다리 뻗고 자고픈데
한 번 깨서 그런지
다시 잠에 들기 어렵다.
어찌하면 푹 잘 수 있을까.
이 밤 중에 걸어야 하나.
비가 오면 좋겠다.
빗소리 asmr을 틀어놓고
잠을 청한다.
이 새벽에 일어난 일련의 해프닝도 잠재우고
나도 재울 수 있는 빗소리가 되길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