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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밖 백선생 Nov 23. 2021

사랑의 엔딩은 또 다른 시작

[사랑한 후에] 전인권(1988)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있나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저기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의

커다란 울음으로도 달랠 수 없어

 

나는 왜 여기 서있나

오늘 밤에 수많은 별의 기억들이

내 앞에 다시 춤을 추는데

 

어디서 왔는지 내 머리 위로

작은 새 한 마리 날아가네

어느새 밝아온 새벽하늘이

다른 하루를 재촉하는데

 

종소리는 맑게 퍼지고

저 불빛은 누굴 위한 걸까

새벽이 내 앞에 다시 설레는데

_____________________


<전인권의 내 인생> 블로그에 소개된 이 곡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느 날 내 삶에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죽음의 실체를 뼈저리게 느꼈다.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현실과의 타협을 싫어하는 한학자의 아내였다. 아버지는 평생 공부하며 잘 쓴 서예, 잘 그린 그림을 병풍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셨다.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서예·문학 등의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판단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께서 판단한 것에 대해선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해 궁금했다. 분명히 강한 분임에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드러운 분을 나는 아직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도 포크적 예술가였다. 북청사자놀음의 꼭 쇠를 자처하며 즐기셨다. 그러니 생활고는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형님들이 돈을 번 것은 나중의 일이다.

 

어릴 때 나와 나의 작은 형님은 공부하는 것보다 어머니와 놀고 싶었다. 어머니와 같이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 보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했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해 매일 새벽 6시경이면 남대문시장으로 장사를 나가셨다. 그때는 자정이면 사이렌 소리가 들렸는데 어머니는 매일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에야 돌아오셨다. 그래서 나와 작은 형님은 우리 친척 중에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아주머니 손에 의해 키워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의 힘이 필요했다.

 

“에구 요것들아. 너희는 내가 없으면 고생문이 훤하다.”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그 말씀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함경도 사람들은 “사랑한다”라는 말을 잘 안 한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셋째 주 일요일에 딱 한 번 쉬셨다. 그러나 그것도 두세 달 만에 한 번이었다. 약속은 깨지기 일쑤. 집에 돈이 없었다. 구청은 툭하면 무허가로 지어진 우리 집 지붕을 헐어버렸다. 나와 작은 형님은 엄마 백밖에 없었다. 지붕이 헐린 것을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 확인한 어머니는 우셨다. 우리도 따라 울었다.

 

우리 삼 형제 중 나를 어머니는 유독 이뻐하셨다.

 

“학교 다녀오는 길에 시장으로 와라. 냉면 사줄게.”

 

어머니도 우리가 보고 싶으신 거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원래 그러면 안되지만 병원에서 ‘야매로’ 집으로 모신 어머니 앞에는 하얗게 촛불이 밝혀졌다. 나는 그때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을 목격했다. 갑자기 아버지께서 하얀 방의 어머니 시신 앞에 털썩 주저앉아 “내가 미안하다. 잘 가거라. 내가 잘못했다”며 커다란 소리로 엉엉 우시는 거였다. 나도 울었다. 작은 형님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늘 들어오시던 뒷문 앞에서 울었다. 동시에 큰 형님은 갑자기 “어머니!” 하고 밖에서 어머니를 목놓아 부르셨다.

 

나는 그 후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졌다.

 

–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1302038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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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 백 선생의 p.s.


허무하다.

어떤 사랑이든.

사랑한 후에는.


사랑한 후란

사랑의 엔딩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이다.

무언가 새로운 게 돋아난다.


밤이 오면 하늘의 별만큼이나 올라오는 별의별 상념들

하나하나 상대하느라 잠 못 들고 꼬박 밤을 새운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면 충혈된 눈으로 내가 있을 곳에 강제 소환되어 기계처럼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렇게 멍하게 하루를 정리하면 다시 또 불면의 밤이 시작된다.


이러한 굴레에서 만신창이가 되고

사랑했던 자신이 극도의 허무감에 에워싸여 너덜너덜해져서

심장 뛰고 숨 쉬는 생명체만이 남게 될 때.

생명체로써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겨우겨우 자신을 일으키고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될 때야 비로소

지옥 같은 생활의 굴레와 괴물 같은 허무주의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게 된다.


명곡 중의 명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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