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인 현실을 담은 픽션
[가버나움](2019): 2019.9.12. 본인 인스타그램 게시물
감독: 나딘 라바키
출연: 자인 알 라피아, 요르다누스 시프로우
배우 이병헌의 추천 영화, <가버나움>
1. 요나스가 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정말 많이 아팠다. 육아를 해본 엄마들은 다 알 거다. 저건 정말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저 또래의 아이를 캐리어에 담아 옮긴다? 어른들이 먹는 음식이나 다른 아기가 먹던 분유, 타지도 않은 분유 분말 가루를 먹여도 애가 저렇게 멀쩡할 수 있다고? 추운데 옷을 저렇게 입히고 바깥을 그렇게 돌아다녔는데도 애가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나? 저렇게 하루만 지내도 보통 아기들은 장염이나 감기, 폐렴 등에 걸릴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에 영아사망률이 많았던 게 다 그런 이유일 텐데. 아무리 영화라지만 애를 저렇게 본다는 건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내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이 지적들이 실제 현실인 건 아닐까? 그래서 영화인 걸까? 정말 모르겠다. 애를 저렇게 두면 진짜 애는 죽는다. 저렇게 해도 살 수 있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그대로 로또 확률이다. 보통 애라면 죽는다.
2. 자인의 외모가 배우 이병헌을 많이 닮았다. 입의 모양이나 옆모습이 특히 그랬다. 자인의 누이를 보며 16년 전 진안에서 만났던 한 할머니가 생각났다. "열세 살에 친정 부모가 입 하나 덜 요량으로 민며느리로 들어왔다"며 시작한 시집살이와 한 많은 생애담. 오래오래 눈 촉촉, 속 먹먹게 한 그 할머니. 그때 83세라 했으니 지금 살아계시면 99세일 테지만 아마 돌아가셨지 싶다.
3. 입하나 덜려고 등 떠밀러 갔던 시집에서 그 대우 좋을 리 만무하겠고. 저 집에서 입 덜려 보낸 자식이니 이 집서 어찌해도 할 말 없을 터. 그러니 내 집 밥 줘서 받을 바에야 그 본전 생각나서 얼마나 뽑아먹어야 직성이 풀렸겠냐고. 다시 말해 그리 등 떠밀려갔던 그 시집에서 뽑아 먹히느라 시달리던 그 한이 오죽했을까! 우리나라의 반 세기 전만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현실이었다.
4.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는 자인. 저런 현실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도 더 성실하게 일하고 더 책임감 있게 동생을 챙기는 자인. 그를 돌아버리게 했던 결정적 계기는 부모가 열한 살짜리 누이를 늙은 놈한테 팔아버린 사건이었다. 열한 살이라면 우리나라 나이로는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이다. 그런 아이를 신부로 삼아 임신을 하게 하고 죽게 놔둔다? 우리 할머니도 왜정 때 일본 놈들한테 안 붙들려가려고 14세에 결혼은 했지만 첫 아이는 스물셋에 낳으셨다. 불임이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이런 관습은 영화 [님하 그 물을 건너지 마오]에도 나온다. 열셋에 시집을 왔는데 너무 아까워서 손도 못 댔다고. 적어도 부부로서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사연이 있어서 일찍 데려올 수밖에 없었지만 너무 어린 여성이라면 아무리 아내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 아니, 아내니까 내 식구니까 더 아껴줘야지. 열한 살짜리랑 결혼하겠다는 늙은 미친놈은, 그 어린애를 기어코 임신까지 하게 만드는 변태성애자가 아닐 수 없다. 자인의 말이 딱 맞다. 개새끼.
5. 현진건의 소설을 읽으면서 짙게 느껴지는 페이소스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자인의 웃는 사진으로 멈춘 엔딩 장면. 어두운 표정의 자인에게 신분증 사진이니 웃으라는 화면 밖 누군가. 그 상황에서 그 말이 묘하게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보는 나도 도저히 웃음이 안 나오는데 웃으라니. 그런데 그 이유가 신분증 사진이어서야. 그러니까 망설이다가 웃는 자인. 웃을 수 없는 현실을 웃음으로 무마 혹은 왜곡시키고픈 아이는 아닌 것이 영화 내내 그 성깔로 암시됐고. 드디어 신분증이 생겨서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잠시 스쳐가며 웃었던 웃음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설정을 엔딩으로 잡은 감독의 멱살을 잡을 것 같다.
6.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정말로. 어딘지 모르게 치밀했다. 서사론을 강의할 기회가 있다면 한번 보여주고 싶은 영화이다. 주제구현 방식 또한 독특했다. 극사실적이며 고발적인 다큐 형식처럼 보이나 서사 기법이 정밀하게 들어가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