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홀로 깨어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거야.

by 집밖 백선생

잠이 오지 않는다. 아파트 주변을 걸으러 나왔더니 눈이 내린다. 아마 새벽녘에 쌓일 것 같다. 새벽예배 차량 운행해야 하는 남편이 걱정된다.


하늘이 차다. 드디어 투명해졌다. 올 가을 유독 구름이 많았던 하늘은 겨울이 되어서야 이렇게 부서지고 있다. 언제나 그랬다. 하늘이 우울해서 나도 우울한지, 내가 우울하면 하늘도 우울한지. 하늘은 늘 내 기분을 대신 해주곤 했다.

이번 겨울. 하늘은 이렇게 자주 부서진다. 텅 빈 허공에서 눈가루로 부서져 차가운 기운 속을 흩나른다.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싶은 내 마음처럼. 이젠 다시 오지 않을 사랑을 송별하듯, 사춘기 소녀와도 같이 설렜던 마음들,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도 떨리는 순간들이 그저 좋았던 마음들, 아마 내 인생에서 다신 오지 않을 소중함들, 이제는 다 덮어버리고 싶은 내 마음처럼 눈이 내린다.

눈이 그저 내린다고 하기엔 체감온도가 너무 춥고, 보는 내 눈도 많이 아프다. 아마 텅 빈 새벽의 아파트 주차장 속에서 한동안 꼼짝 않고 바라봤던 저 가로등에 비추인 눈들은 내겐 부서짐으로 다가왔다. 파괴하고 부서뜨려 가루로 소멸되는 하늘의 한 귀퉁이를 느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는 느낌이 이런 거였구나. 그렇게 텅 빈 지상의 한 켠에서 한 세계를 철저히 무너뜨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난 울고 있었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부리는 마법. 시간을 멈추고 늑대를 데려오는 마법. 꼼짝도 않고 가루로 흩날리는 허공이 순간 그 마법을 부려줬으면 싶었다.


그래. 시간이 정지됐으면 좋겠어. 그 틈에 네가 성큼성큼 걸어왔으면 좋겠어. 우리 함께 바다에 갔으면 좋겠어. 너와 내가 좋아하는 바다에. 네가 운전을 해준다면, 내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줄게. 그렇게 단 하루만 너와 허락된 시간이 있었으면 정말 좋겠어. 세상의 시간이 정지된 그 틈 어딘가에서 딱 너와 나만 함께 할 수 있는 단 하루의 시간, 내가 꿈에서도 꿈꿀 수 없는 단 하루의 시간.


그런데, 없잖아. 이렇게 부숴버리고 무너뜨리는 내가 울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 이 눈이 쌓일 때쯤 모든 게 다 덮일 거야. 난 언제나 그랬듯 아마 이곳에서 널 묻을 것 같아. 이젠 더 이상 내 것 아닌 열망들, 내 것이 될 수 없는 희망들, 꿈결 같았던 사랑들, 다신 되돌릴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시간들.


2003년에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내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느끼게 해 줬던 유일한 분이셨다. 내 인생의 모든 사랑의 원형은 할머니였다. 부모님도 물론 나를 사랑하셨겠지만 엄격하시고 표현을 잘하지 않으셨기에 잘 느껴지지 않았다. 충분히 표현하고 지지해줬던 유일한 사랑받는 느낌의 기준은 내겐 할머니였다.

할머니랑 비슷한 사람을 좋아했다. 친구들도, 연인들도 대체로 우리 할머니 같은 사람들과 친해졌다. 남편도 우리 할머니랑 비슷한 사람이고, 내 아들도 우리 할머니의 환생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할머니와 닮았다. 내 사랑은 모두 할머니의 바운데리에서 자유로웠다.

그런 할머니께서 꿈에 나오셨다. 나를 안아주셨다. 평온해 보였다. 좋은 곳에 계시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를 못 알아보셨다. 섭섭했다기보다는 이제 나도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젠 나도 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해. 단 한 번만이라도 할머니의 품에 다시 안길 수만 있다면! 그러나 단 하루도 그런 하루는 없다.


이젠 누군가의 사랑에 의지해서 내 사랑을 풀어내는 시기는 지났다. 나도 이젠 받은 사랑을 돌려줄 어른의 바운데리로 들어간 것이다. 난 더 이상 빨강머리 앤이 아니고, 마릴라나 머슈 아저씨인 것이다. 알 속에서 썩어 죽을 뻔했던 나는 올해 이 지독한 열병으로 알을 깨며 앤이 아닌 마릴라로 거듭났다. 이젠 너의 뒤에서 사랑만은 후히 주며, 마음만은 전부일 수 있는 어른으로 인생의 후반부를 살아야 하는가 보다. 내가 간직했던 소망은 이렇게 산산이 부서졌지만, 차가운 눈발 속에서도 뜨거웠던 눈시울이 내게 말했던 건 꼭 기억하고 싶다.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거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