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닌 사이
사랑도 사랑이고, 우정도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노래의 사랑이라면 아마도 연인과의 연정을 말하는 것이겠지? 연정과 우정 사이라는 뜻일 것이다.
나야 결혼한 지 오래됐기에 내게 연정이라 함은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노래 가사에서 나오는 사랑과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지가 오래됐다. 따라서 연애에 관한 사랑을 끄집어내려면 한 이십여 년 전부터 결혼 전까지의 연애를 했던 감정을 끄집어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내가 쓰는 연정의 감정이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정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쓰는 연정과 우정에 대한 표현의 온도 차이는 현재의 내 상황에서 객관성을 결여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난 연정에서 실패하는 것보다는 우정에서 실패하는 것이 훨씬 힘겹다. 애인을 잃고 난 뒤에는 몇 달 아프다가 잊히는데, 친구를 잃고 나면 이게 회복이 되질 않는다. 애인과의 결별은 그 사람 하나만 안 보는 것이지만, 친구와의 결별은 자칫하면 얽히고설킨 관계망의 전체가 다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난 친구가 좁고 깊은가 보다.
어떤 친구를 안 보기로 했다. 그 친구와 계속 보는 것은 지속적인 내면의 스크레치를 감내해야 하는 관계로 설정이 된 것이 개선 되지를 않았다. 대화를 시도해보긴 했지만, 역시 내 예상처럼 안 하는 것이 나을 뻔한 대화였다. 그 친구가 나르시시스트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와 설정된 관계는 그와 비슷한 관계였다. 시도한 대화의 워딩에 오히려 더 꼬리가 잡혀 나만 더욱 이상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그 친구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나와 안 맞는 친구라는 뜻이다. 그래서 결별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그 친구와 관련된 관계망들 전체가 나를 거부한다. 사실 이게 가장 두려웠던 점이다. 사실 이게 너무 무서워서 그 친구를 참았었다. 그러나 이젠 무서워하지 않기로 한다. 그 친구에 따라 나와의 관계를 정하는 친구들이라면, 궁극적으로 내 친구는 아니었던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두려워하면서 애써봤자, 애초부터 우정이 아닌 것을 붙잡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게 회복이 안 될 정도로 처참하게 비참하다.
그런데 난 우정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심장에서 펌프질 하는 강력한 거부 반응이 타자를 치는 내 손가락에 강력하게 전기충격처럼 전해지는 것을 자주 체험하게 되었다. 가면을 쓰고, 허울을 쓰고, 아닌 것을 미화시키는 것은 내 글 쓰는 양심이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밀어버렸다. 아무리 애써도 정말 더 이상은 못 쓰겠다. 내게 주어진 이 아픈 상황들이 나를 참으로 두렵게 했다는 점에서, 그 친구로 인해 알게 된 친구들조차도 애초부터 내 친구가 아니었다는 것을 내 양심은 아마도 처절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잡고 싶었을까? 그렇게들 내가 아니라고 거부하는데, 뭘 그렇게까지 좋아했을까? 진심이었던 마음이 이제야 아깝다.
오늘 26년 전의 친구가 나를 보러 저기 멀리 통영에서 온다. 26년 전 동아리에서 내가 힘겨워했을 때 끝까지 나를 지켜주었던 선배 언니이다. 결국 그 동아리에서 빠져나와 동아리 사람들과는 등질 수밖에 없었지만, 끝까지 나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나를 지지해주고 내가 옳다 말해줬던 그 언니는 26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반갑게 맞을 수 있는 친구이다. 지금의 남편처럼 언제나 내편인 사람들이 아마도 내겐 오랜 지기이자 친구의 결로 닿아지는 듯하다.
친구를 기다리는 오늘의 이 자리에서. 다시 친구가 무엇인가를 성찰해가며. 나의 지난했던 하나의 세계를 정리하고 나아가려 한다. 아마 천안을 떠나면서 정리해야 했던 마지막 관계망이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