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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캐릭터 - 395

by 라한
성훈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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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성시훈

제목: 고향의 향기


“성시훈 훈련병!”

“234번 훈련생 성!시!훈!”


이미 빠진 체력 때문에 무거운 손과 발이었다. 차라리 떼어내고 싶은 고통이 느껴졌지만 참고 참았다. 그건 자신 때문이 아니라 옆의 동료들 때문이기도 했고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의 얼굴이 아른거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밖에 못하나?”

“아닙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가 쿵쿵 울렸다. ‘이제 정말 끝장이다. 다신 못 견디겠다.’ 싶다가도, 다음 순간 ‘에이, 뭐 또 할 만하네?’ 하고 버텨냈다. 여기가 훈련소라는 곳이고, 내가 지금 꼬박꼬박 겪고 있는 현실이었다.


스물여섯에 어렵게 입대한 뒤, 이제 겨우 2주가 지났을 뿐인데 몸 여기저기가 내 것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전날 구보 때 발목을 살짝 접질린 뒤로 퉁퉁 부어오른 발목, PT체조 때 과하게 들었던 팔굽혀펴기 덕분에 날개뼈부터 허리까지 욱신욱신, 어깨에는 이미 파스 냄새가 배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 고통이라는 것도 적응이라는 게 있으니, 좀 지나면 어느새 괜찮아지는 듯? 그것도 잠시, 정신이 돌아오면 다시 타들어가는 통증. 피할 길도 없었다.


그러다 보면 문득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게 있다. 내 여자친구, 아니 지금은 거의 ‘아내’나 다름없는 그녀, 그리고 태어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우리 아기. “스물여섯에 아기 아빠?” 하면, 물론 남들 눈엔 좀 특별해 보이긴 하겠지. 그런데 우리가 사귄 지 벌써 1년도 못 되어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니까, 이건 진짜 특별한 인연이긴 하다.


원래 만나긴 스무 살 때 만났다. 아무 특별함도 없는 날이었는데,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 사 먹으려다 우연히 마주쳤다. 같은 학교였고, 그러다 몇 번 더 스치면서 자연스레 친해졌다. 처음엔 정말 친구로만 지냈다. 내가 복학도 하고 반수도 하느라 정신없었을 때, 내 옆에서 라면 한 봉지 끓여주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근데 한 번은 같이 술 한잔하다가, 그녀가 뜬금없이 진지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나, 사실 너 좋아하고 있었어."


그 말에 들이켜던 소주가 코로 튀어나올 뻔했다. 난 정말 친구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묵묵히 옆에 있어 준 이유가 다 그 마음이었다니.


그렇게 만난 지 딱 5년 만에 우리가 사귀게 됐다. 딱 25살에. 남들한테는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우리에겐 속도 따위 중요치 않았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1년도 안 돼서 아이가 찾아오고… 군대 영장은 계속 미루기만 했는데, 이미 몇 번이나 뒤로 빼 온 입대 시기가 더는 미뤄지지 않았다.


‘아, 이참에 결혼해서, 혹시 상근이나 사회복무라도 노려볼까?’ 하고 속으로 생각은 했지만, 또 그게 꼭 내 뜻대로 될 리가 없잖아. 그런 가운데서도 그녀는 군대 가기 전날 “나 우리 결혼하자. 가서 열심히 하고, 돌아오면 바로 식 올리자.” 하며 반지를 내밀었다.


그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이렇게 입대하는 게 맞나? 아이도 생긴 마당에 이대로 떠나버려도 되나?” 하는 무거운 고민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런데… 이런 모든 걸 생각할 새도 없이 나는 이곳, 훈련소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뛰어다니고 있다.


"성시훈 훈련병!"


굵은 확성기 소리가 뇌리 대신 고막을 강타한다. 덜컥, 심장도 깜짝 놀라는 기분이다.


"234번 훈련생 성!시!훈!"


반사적으로 몸을 쭉 폈다가, 발목이 찌릿해서 잠시 인상을 쓴다. 이거 또 잘못 보였다간 ‘느려터졌네’ 하고 교관에게 한 소리 들으려나. 하지만 지금은 버텨야 한다. 내 목숨이기도 하고, 나를 기다리는 가족과 그녀와 아기를 위해서라도.


“이 정도밖에 못하나?”


교관이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본다. 아직 PT시간도 안 끝났는데, 이미 땀은 줄줄 흐르고 시야도 약간 흔들린다. 한계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몸이 먼저 알려주지만, 이따가 체력단련장 이동해봐라, 지금은 맛보기일 뿐이다.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대답한다. 진짜 한계치를 넘으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진다. 이미 충분히 맛은 본 것 같은데, 훈련소 생활은 그런 ‘맛보기’를 매일 새로운 버전으로 선보이는 곳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쉬는 시간 잠깐이 주어지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 생각을 한다. 아니, 아이 생각도 한다. 아직 이름을 정하진 못했는데, 우리 할머니가 옛날부터 내려오는 뭔가 그 전통적인 이름이 좋다고 하시고, 아버지는 현대적인 느낌의 이름을 추천하시고… 어쨌든 내 의견도 들어야 할 텐데, 지금은 여기 갇혀 있으니 어떡하나.


그리고 여자친구, 아니 곧 아내가 될 그녀는 또 우리 집에 자주 찾아가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께 인사도 드리고, 심지어 집안일도 거들어주고 있단다.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농촌에서 살고 계시고, 우리 아버지까지 함께 대가족으로 지내는 편이라, 늘 일손이 바쁘다. 그런데 도시에 살던 그녀가 거기 가서 열심히 돕고 있다니, 말만 들어도 짠하고 뿌듯하고 미안하고 별 감정이 다 뒤섞인다.


한편으론 농촌 생활을 돕는 그녀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다. 분명히 힘들 텐데, 그 와중에도 우리 아기를 돌볼 생각까지 해야 하니,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것 같다. 그래서 어서 빨리 나도 나가서 도와주고 싶다.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거다.


그리고, 최근 훈련소에서 떠도는 이상한 소문이 있다. 뭔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다나. 혹시 좀비 바이러스 아니냐고 농담처럼 지껄이던 사람들도, 요 며칠 뉴스에 ‘원인 불명 감염자 급증’ 같은 자막이 뜬 걸 본 뒤론 웃지 않는다. 간부들도 제대로 설명을 해주진 않지만, 뭔가 꽤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다들 눈치채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훈련소 측에서도 우리 훈련병들을 제대로 ‘운용’할 준비를 하는 건지, 무장훈련 일정이 당겨지고, 각 부대별로 비상 연락망을 재정비 중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진짜로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하지? 아니, 전쟁이 아니라 좀비 사태면… 그러면 난 아직 총 제대로 쏴보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무엇보다, 만약 정말 상황이 심각해져서 군이 투입된다고 치자. 나는 그 와중에 도망쳐서 그녀와 우리 가족을 지키러 가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 든다. 물론 탈영은 중범죄다. 군사재판에 회부되면 큰일 나는 것도 안다. 그런데 이런 극한 상황에서, 가족과 아기가 위험해진다면…?


내 마음속엔 불현듯 질문이 떠오른다.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아니면 내 소중한 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가.’


어쨌든 그런 고민을 하며 매일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다. 동시에, 밤이 되면 통신 제한으로 그녀와 연락도 못 하니, 오직 편지만이 유일한 소통 수단이다. 다행히 휴가 이전에 편지가 몇 번 왔다.


불 꺼진 생활관에서, 머리맡 라이트를 조심스레 켠다. 벌써 신체검사 다 끝내고, 하루 종일 구르고 난 뒤, 잘 준비하는 시간이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옆 사람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행동한다.


편지를 하나 꺼낸다. 겉봉투에 큼직하게 적힌 내 이름 아래 ‘사랑하는 시훈오빠에게’라고 적혀 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훈아, 잘 지내지?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어제도 나한테 텃밭 일 좀 도와달라고 하셔서 마늘종 뽑고 왔어. 손에 물집이 잡히긴 했는데, 금세 적응되더라. 시골 생활이 의외로 마음이 편안하고 힐링이 된다니까. 아기는 할아버지가 품에 안고 주무시기도 하고, 아침이면 할머니가 우리 아기 손잡고 아기체조(?) 시키신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그리고 말야, 요즘 뉴스가 이상해. 갑자기 사람들 막 쓰러지고, 공격성이 어쩌고 그러는데, 시훈오빠 있는 부대는 괜찮지? 걱정된다… 정말 무리하지 말고 건강 관리 잘 하고, 다치지 말아줘. 아기랑 나랑 아버님이랑 할머니, 할아버지 다 기다리고 있어. 꼭 이겨내고 멋지게 돌아와. 사랑해."


편지를 읽고 있자니, 여기가 엄청 고된 훈련소라는 사실이 잠시 잊힌다. 마치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 물론 현실은 차갑고, 이 생활관 바닥은 등짝이 시큰거릴 정도로 딱딱하다.


그런데 잠시 뒤, 돌아누우면서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좀비 바이러스가 진짜 퍼진다면…? 아니, 뉴스에서 "감염자들의 폭력성" 운운하는 걸 보면, 이미 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은 괜찮은가? 만일 벌써 동네까지 번졌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나는 꼼짝 없이 갇혀 있다. 군에서 마음대로 ‘오케이, 너 가도 좋아’ 해줄 리도 없다. 게다가 아기를 보호해야 한다면, 나는 지금 당장 이곳을 박차고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탈영.’ 귀에 걸린 가시 같다. 큰일 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요 며칠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하지만 당장 결정할 수는 없다. 일단 훈련이 계속되는 한,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다음날 아침,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다. 궂은 날씨에도 훈련은 계속된다. 무더기로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리는 우비도 없이 진흙탕에서 엎드렸다 일어났다 반복한다. 교관은 더욱 신이 난다. 훈련은 괴로운 자에게는 지옥, 시키는 자에게는 천국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사격훈련 준비를 하라고 해서, 무거운 개인화기를 잡고 탄약을 수령한다. 모든 훈련병이 긴장하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또 그 여자가 떠오른다. ‘이제 실탄 만지네. 내게 주어진 5.56mm 한 발 한 발이, 혹시 나중에 진짜 사람을 쏴야 하는 데에 쓰이진 않을까?’ ‘아니, 좀비가 되었다면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우리는 사격장에 누워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빗물에 젖은 방아쇠가 미끌거려서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탕탕탕탕!’ 귀를 때리는 총소리가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다.


‘이제야 약간 군인 티가 나는 건가?’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더 불안해진다. 만약 이 총을 들고 실전 투입되면… 그리고 그 실전이 정말 좀비 사태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교관이 목표물을 향해 몇 발 명중시켰는지 체크하며 외친다.


"234번 훈련생, 다섯 발 중 세 발 명중! 분발해!"


결과가 썩 좋진 않지만, 처음 실사격 치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위안삼는다. 그러다 다시 사로에 엎드려 2차 탄착군을 형성한다. 빗줄기에 숨이 막히듯, 이곳저곳에선 ‘탕, 탕’ 하는 격발음이 퍼진다.


저녁 점호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온다. 휴식 시간은 쥐꼬리만큼 주어진다. 그 시간에도 옆 동기들과 교관들의 눈을 피해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짧은 대화를 나눈다.


"야, 시훈아."

"왜?"

"좀비 바이러스 말이야… 우리 혹시 투입되는 거 아냐?"


동기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거… 그렇게 되면 진짜 우리 목숨 건지는 거 힘들 걸?"

"하… 그러니까. 군대 와서 탈영은 진짜 생각도 못 했는데, 진짜 실전 투입되고, 집에 아버지 어머니 혼자 계시면 어떡하냐…"

"나도… 난 더 심각해. 아직 애도 있고, 여자친구도 시골에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 심장이 쿵쿵 뛴다. 원래 훈련소에서는 "군인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가치관을 집중 주입한다. 그런데, 내 상황처럼 지켜야 할 가족이 분명하게 있는 경우, 그게 쉽지 않다. ‘나라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아이와 여자를 구하는 건 더 시급한 거 아닌가?’ 이런 갈등이 솟구친다.


그렇게 서로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다가, 훈련병 관리관이 들어온다는 소문에 황급히 뿔뿔이 흩어진다.


"234번, 조용히 안 해?"

"네, 죄송합니다."


잠자코 자리에 눕는다. 불이 꺼지면, 또 다시 고통스러운 통증과 싸우며 뒤척이는 시간이 시작된다.


며칠 뒤, 불안하던 소문이 확실해졌다. 뭔가 ‘실제 상황’에 준하는 위기 사태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정확히는 알려주지 않지만, ‘외부와의 연락을 조절한다’ ‘방역 상황이 엄중하다’ 이런 식으로 공문이 돌고, 훈련 프로그램이 변경된다.


동기들끼리 떠도는 얘기로는, 인근 병원에서 ‘원인불명’ 환자가 다량 발생했고, 그중 몇 명이 호송되던 중 의무대 방향으로 이동했다는 말도 있다. 가짜 뉴스인지 진짜 뉴스인지 헷갈리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살벌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우리는 갑작스럽게 생활관 밖으로 집합 명령을 받았다. 작전명령 비슷한 브리핑을 하겠다는 것이다.


"전 훈련병은 운동장에 전투복과 전투화 착용 후 집합하라!"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에 줄지어 선다. 우리를 둘러싼 간부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 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중대장이 단상 위에 오른다. 입을 떼는 순간, 모두 긴장한 채 숨죽인다.


"현재 국가 비상사태가 예상된다는 상부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바이러스 발생으로 인한 가짜 뉴스가 많지만, 일부 지역에선 이미 통제가 어려운 상황에 도달했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본 훈련소는 필사적으로 방어 태세를 갖출 것이며, 필요시 우리 훈련병들도 지원 임무에 투입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순간 모든 훈련병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임이 인다. 난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와, 이거… 장난 아니구나. 진짜 현실이구나….’


"동요하지 말고, 지휘체계에 따라 움직이도록. 특히 탈영 등 불법행위 시, 군법으로 엄중 처리될 것이니 그리 알라!"


탈영이란 단어를 또 들어버렸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사실 요 며칠간 내 머릿속을 맴돌던 그것이, 이제 대놓고 경고로 돌아온 셈이다.


‘이제 어쩌지? 진짜 실전 투입되면? 가족들은? 아이는?’


그런 공포와 혼란, 그리고 책임감이 한데 엉킨 채로 운동장에서 해산 명령을 기다린다.


그날 밤, 난 잘 수가 없었다. 아무리 누워도 머리가 복잡하다. 삶에서 이렇게 크고 무서운 고민을 한 건 처음이다. 아직 스물여섯, 결혼도 제대로 못 했고, 아기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입대했는데, 이대로 군인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정말로 보호해야 할 건 나라 이전에 바로 내 가족 아닐까?


‘가족이 해를 입으면 어떡하지? 아니, 벌써 위험에 처해 있을지도 몰라. 시골이라고 해서 안전하란 법이 없어. 정말 그 바이러스가 좀비성 전염이라면, 도시에서만 머무르는 게 아니다. 언제라도 시골로 번질 수 있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그러다 다시 ‘탈영’이란 단어가 스멀스멀 떠오른다.


‘그래, 탈영은 중죄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나 말고도 탈영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있을 거야. 그리고 내 가족, 내 아기를 지키려면…’


하지만 막상 실행하려면 감시가 너무 삼엄하다. 자유롭게 짐 싸 들고 나갈 수도 없고, 총기 관리도 엄격하다. 휴대폰도 못 쓰는 상황에서 도망치다 잡히면 곧장 영창행일 텐데…


하지만 만약 실제로 좀비 사태가 터지고, 이 훈련소도 안전하지 않다면? 차라리 빨리 이 곳을 빠져나와 가족을 보호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해버린 순간, 마음은 이미 기울어버렸다. ‘그래, 결국 나는 도망칠 거다. 정말 최후의 방법이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인다.’


다음날 아침 기상나팔이 울리고, 우르르 세면장으로 몰려간다. 피곤에 절어 있는 동기들 사이에서도, "야, 어제 그 경고 들었어? 탈영하면 끝장이지?" 하는 대화가 들린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 "진짜 무서운데… 난 부모님이랑 누나가 걱정돼 죽겠어." 하며 한숨이 터진다.


나도 그 속에 끼어 잠시 씻는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거울 속 내 얼굴을 본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 눈밑에 다크서클. 군복 입고 빡빡머리 하고 있으니 영 낯설다. 그런데 그 얼굴 속에는 탈영 결심 같은 무서운 단어가 꿈틀댄다.


연일 계속되는 고된 훈련이 이어진다. 각개전투 훈련, 유격 기초훈련, 그리고 야간 행군까지. 쉬는 틈에 편지가 한 통 더 도착했다.


편지 내용을 보니, 요 며칠 그녀가 전화를 몇 번 시도했는데, 통화가 잘 안 됐다는 말이 적혀 있다. 이 상황이 심상찮아서 계속 시훈오빠 걱정하고 있다며, 가족들도 TV 뉴스 보며 식겁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나, 오빠랑 아기랑 같이 살 그 날만 기다리고 있어. 아기도 이제 조금씩 기어 다닐까 말까 하는데, 그게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얼른 와서 보라고, 진짜로. 사랑해. 우리 힘내자."


편지를 읽는 순간, 코끝이 시큰해진다. 한편으론 마음이 확고해진다. ‘그래, 더 지체하다간 정말로 늦는다. 내가 이곳에서 혹시라도 좀비 퇴치에 투입되어 죽거나, 감염되어버리면 어떡해? 그것도 아니면 이 훈련소가 봉쇄당해버리면 어떡하지?’


‘탈영’… 이제는 거의 마음을 굳혔다. 문제는 타이밍과 방법이다. 어떻게 해야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운명의 날이 왔다.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하루가 또 시작된다. 그런데 오전 점호 때, 갑자기 비상 경보가 울린다. 사이렌 같은 경고음이 신병교육대 전역에 퍼진다. 간부들이 허둥지둥 뛰어다니고, 우리 훈련병들은 집합 위치로 우르르 이동한다.


"조용! 정렬! 보고에 따르면, 인근 지역 병원에서 감염자가 대거 탈출했다. 지금 혹시나 이 지역에 침투할 위험이 있어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 각 생활관별로 무장을 점검하고,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라!"


간부들의 지시가 떨어지지만, 모두가 당황스럽다. 우리가 평소 연습만 했던 그 긴급상황 대처 매뉴얼을 실제로 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나는 정신이 더더욱 혼미해진다. ‘더 이상 기다리면 안 돼. 뭔가 크게 잘못되기 전에, 난 빨리 나가야 해. 그녀와 아기, 가족들한테도 이 바이러스가 닥칠 수 있다고.’


짧은 휴식, 아니 휴식이라기보단 대기 시간이 주어진 틈에 동기 하나가 나를 쿡 찌른다.


"야, 시훈아. 우리… 이거 진짜 전투투입 되면 어떡하냐?"


"나도 모르겠어… 근데, 난… 사실 집으로 갈 거야."


동기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얘가 방금 무슨 말 했지?’ 하는 표정이다.


"뭐… 설마 탈영을 한다고?"

"어. 진짜. 미안한데, 난 가족이 더 걱정돼. 여기서 좀비랑 맞닥뜨릴 만큼, 아직 난 준비도 안 됐고. 괜히 여기서 죽거나 감염되면, 아무것도 못 하고 끝날 것 같아."


동기는 아무 말도 못 한다. 표정이 복잡해진다. 그러다 조심스레 물어본다.


"그래, 방법은 생각해 봤어?"

"아직 자세히는… 그냥 야간에 몰래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근데 울타리 철조망도 있고, 초소에 근무 서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건 해 봐야 알지. 뭐 어떤 방법이든 간에 시도라도 해 보려고."


동기는 한숨을 쉬면서도, 뭔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동조하는 기색이다.


"그래, 나중에라도 방법 되면 나도 좀 알려주라… 나도 부모님이 신경 쓰여 죽겠다."


점심을 대충 먹고, 오후엔 사격 재훈련이 잡혀 있다. 이 비상사태에도, 오히려 더욱 실사격 감각을 숙달시키려는 건지, 간부들이 바쁘게 지휘한다. 사격장으로 이동하던 중, 훈련병 대열이 잠시 멈춰선다. 앞쪽에서 뭔가 소란이 일어난 것 같다.


"뭐야, 누가 넘어졌어?"

"아니, 아니라는데… 웅성웅성…"


앞줄에서 들어보니, 한 훈련병이 갑자기 고열과 구토 증세를 보인 모양이다. 다들 겁먹은 얼굴로 떨어져서 쳐다본다. 혹시 이게 그 바이러스 증상인가? 간부들은 곧장 그 훈련병을 구급차로 실어 보내고, 주변 인원들도 격리 조치한다.


"헐… 이거 진짜 위험한 거 아냐?"

"우리 중에도 감염자가 나온 거야?"


소란이 크게 번질까 봐, 교관들은 더욱 엄하게 우리를 단속한다. 재빨리 사격장으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고, 우리는 우왕좌왕하면서도 그 명령에 따른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아수라장이다. ‘내 옆자리에서 잠자던 동기가 감염됐다면? 생활관 전체가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얼마 안 있어 우리한테도 증상이 나타난다면? 그전에 탈출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제 탈영은 선택이 아니라, 거의 필수처럼 여겨졌다.


야간에 들어서자, 잠시 전기 공급 문제라도 생겼는지, 훈련소 여기저기가 어둠에 잠긴다. 비상 발전기로 최소한의 조명만 들어온다. 그런 상황에서, 간부들은 마스크를 쓰고 분주히 움직인다. 뭔가 더 큰 위험이 닥친 것 같은 느낌.


그 틈을 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어둠, 그리고 이런 혼란이 나에겐 기회다. 초소 병력이 강화됐을 수도 있지만, 분명 혼선이 있을 거다.


마음을 먹자, 심장이 두 배로 뛰기 시작한다. ‘이제 바로 탈출할 것인가? 언제? 어떻게?’ 재빨리 계획을 머릿속에 정리한다.


생활관에서 몰래 나와.

뒷편 화장실이나 쓰레기 분리장 뒤쪽으로 돌아가.

울타리 근방에 있는 배수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

만약 중간에 병사가 있으면, 그 순간을 피해 숨었다가 지나가야지.

평소 청소할 때 본 지형과 구조를 최대한 떠올려본다. 간부들이 뒷문 쪽 통행 금지라며 자주 막았던 곳이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쪽 배수로가 허술하기 때문 아닐까.


"어차피 강행군밖에 답이 없군."


그날 밤, 생활관 소등 후에도 여기저기서 소음이 들린다. 감염 문제로 걱정되는지, 단속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심호흡을 여러 번 하면서 기회를 엿본다.


한 시간, 두 시간… 자정이 훌쩍 넘었을 때, 복도에서 간부들 발소리가 뜸해진다. 동기들 중 몇몇은 이미 상황에 질려버려 다들 곯아떨어졌다. 불침번이 1명 서 있는데, 그는 창가 쪽에서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다.


‘지금이다.’


나는 살금살금 일어나 전투복 상의를 걸치고, 준비해 둔 짐(물통, 남는 건빵, 편지, 작은 손전등 등)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총기는 당연히 두고 가야 한다. 그거 들고 나가면 더 위험해진다.


조심조심 문을 연다. ‘삐걱’ 소리가 날까봐 가슴이 쿵쿵거린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 채지 않는다. 복도 끝까지 살금살금 기어가다시피 간다.


밖으로 나가니, 시원하면서도 스산한 밤공기가 폐속으로 스며든다. 시야는 어둡지만, 모닥불처럼 아까 훈련장 쪽에서 비상등이 켜진 게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나는 건물 벽에 등을 대고, 양쪽을 살핀다. 초소 하나가 오른편,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보인다. 그곳에서 손전등 불빛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저거 피해서 왼편 방향으로 돌아가야겠다.’


심장이 울컥울컥 뛰는 걸 느끼면서,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죽인다.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흙바닥을 골라 걸으니, 발소리가 덜 난다. 그렇게 10미터, 20미터… 조금씩 전진한다.


"누구야?"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 온몸이 얼어붙는다. 간부인가? 아니면 보초 중인 병사?


순간적으로 난 몸을 웅크린다. 아무 소리도 안내고 숨을 죽인다.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거기 아무도 없나?"


다시 들려오는 소리. 가까워지진 않는 것 같다. 누군가 순찰하면서 중얼거리는 걸까. 다행히 내 쪽으론 안 오는 듯하다.


1분쯤이 지나니, 그 목소리는 멀어져 간다. 간신히 살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흥건히 적신다.


간신히 울타리 근처까지 왔다. 철조망 위에는 감시 카메라가 있을 것 같지만, 밤이고 전력 상황도 불안정해서, 다 꺼져 있을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철조망을 넘거나, 혹은 밑의 배수로를 기어가야 하는데, 소리가 날까 봐 두렵다.


나는 고민 끝에 배수로 쪽으로 기어들어간다. 지난번 비가 와서 물이 조금 고여 있고, 여기저기 쓰레기가 걸려 있다.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찌른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참아. 이건 가족을 위해서야.’


배수로 안을 천천히 엉금엉금 기어간다. 온갖 진흙탕과 구정물이 옷에 묻는다. 미끄러지면서 무릎이 긁혀 나가고, 작은 돌멩이에 손바닥이 찔려 피가 조금 난다. 그래도 입술을 꼭 물고 참는다.


그렇게 10여 미터 정도 기어갔을까, 저 앞에 작은 틈새가 보인다. 희미하게 밖의 어둠이 보인다. ‘저기만 지나면… 아마도 훈련소 밖.’


숨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앞으로 힘껏 나아간다. 철망에 걸려 옷이 뜯겨나가려고 하지만, 간신히 몸을 비틀어 빠져나온다.


그리고… ‘툭’ 하고 떨어진 곳은 훈련소 울타리 밖이다. 순간,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해냈다… 진짜 탈영해버렸다.’


잠시 비참함과 안도감이 교차한다. 군법으로는 큰 범죄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다. 최대한 빨리 집에 가야 한다.


울타리 밖에 나오니, 여기서부터 시골길 같은 곳이 이어진다. 훈련소가 위치한 주변 지형을 대충 알고 있다. 밤길을 더듬어 2~3km만 더 걸어가면 작은 버스정류장이 있을 거다. 밤이라 버스가 다닐 것 같진 않지만, 거기서 길을 잡아 택시라도 잡아야 한다. 아니면 무작정 걸어가든가.


어둠 속을 걷는 게 두렵기도 하다. 좀비라도 튀어나올까 봐. 뉴스에서 본 감염자들의 폭력성 얘기가 떠오른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 없지 않나.


한참을 걷는다. 군화를 벗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맨발로 걷다 발 다 까질까 봐 그냥 버틴다. 무거운 전투복에, 군화까지 질질 끌며 달빛 아래 길을 나선다. 가로등도 몇 개 없다. 혹시 누군가와 마주칠까 봐 가슴이 쿵쿵 뛴다.


어느새 새벽에 접어든 시간, 드디어 작은 시골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철재 벤치에 드러누워 있는 떠돌이 고양이 한 마리가 내 기척에 놀라 사라진다. 가로등 불빛 아래 정류장 표지판이 서 있다. 버스 운행 시간표를 보니, 첫차가 아침 6시 반이다. 아직 몇 시간 남았다.


‘그냥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택시 불러야 하나… 근데 휴대폰이 없잖아.’


군대 들어오면서 폰 반납했는데, 그걸 다시 찾을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냥 기다려야 하나.


그런데 이 새벽에 택시가 다닐 가능성도 희박하다. 발품을 팔아 더 큰 도로로 나가야 할까? 그런데 지금 체력으로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결국 난 정류장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 상의 주머니에서 남은 건빵 한 봉지를 꺼내 씹는다. 목이 바짝 타는데 물도 얼마 없다. 철조망을 기어오면서 반 정도 엎질렀다.


"하… 이게 뭐야, 갑자기 노숙자 다 됐네."


자조적으로 중얼거린다. 그래도 어쩌겠나, 조금 더 버티다가 첫차라도 잡아타야지. 시골 농촌 지역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면, 거기서부터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집 쪽으로 갈 수 있을 거다.


집, 그곳에는 그녀와 아기, 그리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가 있다. 모두가 무사해야 할 텐데. 혹시 벌써 누구 한 명이라도 감염돼서 쓰러졌다면 어떡하지? 이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다.


몇 시간을 초조하게 버틴 뒤, 드디어 동이 트기 시작한다. 마침내 버스 한 대가 시골길을 떨리며 들어온다. 낡은 시골버스에 ‘○○터미널행’이라고 적혀 있다. 나는 지폐도 동전도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카드가 될까 싶어 군번 줄 대신 몰래 숨겨둔 신용카드를 꺼낸다.


버스가 서서 문이 열리는데, 기사님이 참 피곤해 보인다. 나는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올라탄다. 군복 차림이라 눈에 띌 법도 한데, 기사님은 그냥 ‘군인인가 보지’ 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


"카드 됩니다."


버스 단말기에 찍으니 다행히 ‘승인’ 소리가 난다. 기계가 멀쩡히 돌아가는 모양이다. 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는다. 온몸이 땀과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으니, 누가 봐도 이상할 텐데, 다들 무심한 듯 창밖만 본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출발한다. 나는 창문 밖 풍경을 본다. 여전히 해가 막 떠오르는 이른 아침, 들판과 낮은 언덕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졌다는데, 여기 시골 풍경은 여전히 평화로워 보이네.’


하지만 이 평화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른다. 뉴스에선 계속 확산되는 감염 얘기가 들려오고, 내가 입대했던 훈련소 안도 이미 초비상 상태였다.


그래도 일단은… 집으로 가야 한다.


약 두 시간 뒤, 버스는 시내 터미널에 도착했다. 내려서 터미널 안을 살펴보니, 여기도 분위기가 이상하다. 사람이 많지 않고, 곳곳에서 마스크를 두세 겹씩 낀 사람들이 눈에 띈다. 전광판엔 결항, 지연이 자주 표시되고 있다.


‘하… 그래도 다른 도시로 가는 고속버스 한 대쯤은 있겠지?’


나는 혹시 모를 경찰 단속이 두려워, 고개를 푹 숙인 채 티켓매표소로 향한다. 다행히 어느 정도 표가 남아 있어서, 곧장 ‘내 고향 시골터미널’로 가는 버스 표를 산다. 다음 차가 30분 뒤에 출발한다.


그 시간 동안, 간신히 화장실에서 몸에 묻은 흙을 조금 닦아낸다. 군복이 너덜너덜해져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백팩이라도 있으면 갈아입을 옷을 챙겼겠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터미널 한쪽 구석 벤치에 앉아 있는데, 벽걸이 TV 뉴스 자막이 보인다. ‘정부, 국가 감염 확산 경계단계 최고수준 상향’ ‘일부 지역 봉쇄 검토 중’ 같은 무시무시한 문구가 지나간다. 화면에서는 병원 앞에서 뛰어다니는 응급요원들과 휘청이는 환자들 모습이 비춰진다.


‘맙소사… 점점 심각해지고 있잖아.’


나는 이를 악물고, ‘어서 빨리 집에 가야 해. 가서 그녀와 아기를 지켜야 해.’ 하고 다짐한다.


드디어 출발 시간이 되고, 버스에 올라탄다. 시외버스는 탑승객이 몇 안 된다. 다들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힐끗힐끗 본다. 혹시 감염자가 있을까 봐 두려운 건가 보다.


창가에 앉아 고개를 기댄다. 밤새 탈영하고 걸어온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하지만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난 지금 범죄자다. 만약 어딘가에서 군사경찰이라도 나를 찾아나선다면? 아니, 그보다 가족들은 안전할까?’ 이런 온갖 걱정이 머리를 채운다.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국도로 빠져나가고, 시골 마을들을 지난다. 어느 순간,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좀 익숙하다. 내가 어릴 때부터 봐 온 고향의 논밭, 그리고 작은 저수지,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산들.


‘드디어 돌아왔구나.’


가슴이 두근거린다. 곧 있으면 정류장에 내려, 집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면 도착한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춘다. 난 허둥지둥 내려서 주위를 살핀다. 여긴 도심이 아니라, 정말 시골 마을 입구다. 논밭 사이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를 따라가면, 우리 집이 있는 마을이 나온다.


모든 게 잠잠하다. 오히려 적막할 정도로 조용하다. 좀비 사태라느니 감염 확산이라느니, 여긴 전혀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더 무섭다. 혹시 이미 감염된 사람이 숨어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한 발 한 발 마을 쪽으로 향한다. 길가에 농가 몇 채가 보이지만, 대문이 닫혀 있고, 인기척이 없다. 아침 시간이면 다들 밭에 나가 계실 시간인가?


‘그래도 빨리 집에 도착해야겠다.’


땀에 젖고, 흙먼지에 범벅이 된 채로 계속 걷는다. 그러다, 익숙한 담벼락을 돌자 드디어 내 집 마당이 나타난다. 낮은 대문 너머로 텃밭과 울타리가 보이고, 그 뒤로 고즈넉한 기와지붕이 한 채 서 있다.


"할머니! 나 왔어요!"


나는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런데 텃밭이 조금 엉망이다. 마늘과 상추가 시들시들해 보인다. 평소 할머니가 세심하게 관리하셨는데, 요 며칠 아무도 손을 못 쓴 걸까?


"아버지! 할아버지!"


조용하다. 마당엔 인기척이 없다. 혹시 집 안에 계신가 싶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잠겨 있지 않았다. 거실로 들어서자, 뭔가 쿰쿰한 공기가 코를 찌른다.


"…계세요?"


대답이 없다. 심장이 쿵쾅 뛰기 시작한다. 급하게 방들을 열어본다. 할머니 방, 할아버지 방, 다 텅 비어 있다. 사람이 살던 흔적은 있는데, 정리가 중간에 멈춘 듯한 느낌. 이불이 흩어져 있고, 식탁 위엔 반쯤 마른 김치와 밥이 남아 있다.


"대체 무슨 일이…"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드르륵.’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에 재빨리 돌아본다.


"…누구세요?"


내 목소리가 떨린다. 혹시 감염된 사람이라도 들어온 건가?


그러자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다름 아닌 그녀. 내 여자친구, 아니 ‘아내’나 다름없는 그녀. 머리는 엉망, 안색은 창백하지만, 분명 그녀다.


"시훈오빠?"


그녀도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이 동그라진다. 난 순간 기쁨에 울컥한다. ‘아, 그래도 무사했구나!’ 하지만 그녀 표정이 너무 심각하다.


"오빠, 어떻게… 군대는?"

"아니, 거기서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 걱정돼서 그냥 나왔어."


그녀는 잠시 당황하는 듯, 그러다 내 손을 꽉 잡는다.


"다행이야, 진짜… 미안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우리 가족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는?"


그녀의 얼굴이 굳는다. 내 심장도 덜컥 내려앉는다.


"며칠 전에, 할아버지가 갑자기 열이 심하게 나고, 이상증세를 보여서… 아버지가 모시고 병원으로 가셨는데, 그때 할머니도 같이 가셨고… 그 뒤로 연락이 안 돼."

"뭐? 그럼 지금 여긴 너랑 아기만 있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나도 아기를 데리고 병원으로 찾아가려 했는데, 이미 그 병원이 폐쇄됐다는 소문이 퍼지더라고. 감염자가 대거 유입됐다고…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고, 이렇게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어."

"아기는… 괜찮아? 어디 있어?"

"방 안에 재워놨는데, 지금 열은 없고… 괜찮아 보여. 그래도 불안해서 계속 지켜보고 있어."


나는 재빨리 안방으로 간다. 안쪽 작은 요람 위에, 아직 한 살이 채 안 된 우리 아기가 새근새근 자고 있다. 작은 숨소리가 너무 소중하게 들린다. 난 가슴이 뭉클해져서 아이의 손등에 조심스레 손을 얹는다. 다행히 체온이 정상 같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어."


그녀가 뒤에서 다가와 내 등에 이마를 기댄다.


"아니야,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와줘서 고마워… 난 진짜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래, 일단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는… 음. 병원에 계시면 아마 격리됐을 수도 있어. 그런데 그 뒤로 연락이 안 된다면… 정말 걱정된다."

"응, 그래서 친척분들한테도 물어봤는데, 다들 소식을 못 들었다고 하시고."

"하…"


나는 머리를 싸맨다. 집에 남아 있던 식량이 많지 않다면, 우린 곧 굶을 수도 있다. 그리고 혹시 감염자들이 동네에 들어오면 어떡하나.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


"일단, 우리 여기 계속 머무는 것도 위험해. 감염자가 들어올 수도 있고, 상황이 더 심각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럼 어딜 가?"

"글쎄… 일단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더 깊은 시골이나 산으로 피신해야 하나? 아니면 반대로 군부대가 있는 쪽으로 가서 보호받아야 하나? 그런데 나 지금 탈영했단 말이야."

"그럼 군부대 쪽은 위험하겠네. 잡히면 어쩔 수 없이 다시 끌려갈 테니까."

"맞아. 그래서 나도 어쩔 줄 모르겠어. 근데 지금 도시로 가는 건 미친 짓이겠지? 감염자가 제일 많을 텐데…"

"응, 도시엔 이미 봉쇄 구역이 생겼다는 소문도 있어."

"결국… 우리가 여기서 버티면서, 어떻게든 가족들 연락 기다리거나, 아니면 다른 안전한 곳을 찾아 이동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갑자기 ‘내가 제대로 판단하고 있나?’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평생 이런 재난 상황 따윈 겪어 본 적이 없으니, 뭘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옆에서 나를 믿고 따라주는 그녀와, 무방비 상태의 우리 아기가 눈에 밟힌다.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할 존재들.


"좋아, 일단 서둘러 집 주변부터 단단히 지키고, 식량 확보부터 하자. 그리고 혹시 밤이 되면 이 집에 불청객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문단속을 확실히 하고. 칼이나 농기구라도 미리 준비해 두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한껏 겁에 질렸다는 게 역력하다.


나는 그 눈물을 닦아 주며, 스스로에게도 다짐한다. ‘그렇지, 지금 울 때가 아니다. 내가 군인이긴 해도, 이제 나라보다 내 가족이 먼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그렇게 하여, 내 탈영 후의 ‘생존기’가 시작된다. 세상은 점점 혼돈으로 치닫고 있고, 좀비 바이러스라 불리는 감염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군에서는 나를 찾으려 할 것이고, 가족들은 행방불명 상태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다. 바로 내 곁에는 이 여자가 있고, 우리 아이가 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나만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 시골 생활이 이렇게 서바이벌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한숨 섞인 내 독백에, 그녀가 힘없이 미소 짓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오빠가 와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억지로라도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꼭 잡는다.


"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우리, 끝까지 버텨보자."


집 창문 밖으로, 먼 언덕 너머에 해가 다시 비쳐오른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내가 이 고향의 향기를 다시 맡으며, 평범하게 살 수 있을지, 아니면 이 혼돈 속에서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여기, 우리 사랑의 시작이자, 내 인생의 모든 의미가 존재하는 이곳에서, 나는 끝까지 싸워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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