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편
제 아이는 엄마의 무지(03화 참조)로 인해 사교육 청정구역에서 지냈지만, 재미있는 놀이 등을 통해 한글도 떼고, 수학 개념도 익히며 또래 아이들에 뒤지지 않는 인지적 발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회성'이었습니다.
주변에 아이를 돌봐줄 어른들은 많았으나, 또래 아이들과의 관계를 형성해 줄 만한 환경은 아니어서 저는 늘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2월생인 아이가 세돌이 되고, 한국 나이로 다섯 살이 되면, 그 당시 사회 흐름에 따라 '어디든' 보내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경험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세돌이 되고 나자, 그 '어디든'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아 몇 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첫 번째 고민은, 보육 기관으로 보낼 것이냐, 교육 기관으로 보낼 것이냐.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어린이집은 보건복지부가 관리하는 보육 기관, 유치원은 교육부가 관리하는 교육 기관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두 기관은 영유아보육법과 유아교육법 등 서로 다른 법적 기준에 따라 운영되고 있고, '돌봄'과 '학습'이라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아이를 돌봐줄 할머니도 계시고 하니, 하원시간이 조금 빠르긴 해도 아이의 교육과 적응을 위해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유치원을 보내는 것이 더 낫다는 조언들을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가 아직 너무 어리다는 생각에 일단은 보육에 중점을 둔 어린이 집이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고심 끝에 5세와 6세는 어린이집(보육 기관), 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7세는 유치원(교육 기관)에 보내는 절충안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그 당시 아이의 세상이 아직은 학습보다는 사회성과 정서발달에 더 집중되었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고민은, 공교육 기관으로 보낼 것이냐, 사교육 기관으로 보낼 것이냐.
생후 27개월, 아이를 문화센터에 데리고 간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아이가 사회성을 배우러 어디든 가기 전에 적응하는 단계가 필요할 것이라 판단했고, 더불어 이 수업들을 통해 아이가 재미있어하고 관심을 보이는 분야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는 아이가 가장 집중해서 수업을 듣고, 가장 재미있어하며, 가장 흥미를 보이는 수업을 발견하였습니다. 바로 블록(레고) 수업이었는데,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작품들을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며,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아이가 좋아하는 블록수업이 포함된 곳이면 어디든 보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사교육 기관인 '레고 교육센터'라는 곳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은 거의 운영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꽤 괜찮은 시스템을 갖춘 곳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든 커리큘럼이 유아 교육을 기반으로 하되, 레고 놀이를 접목하는 형태라는 점, 소수정예라는 점, 원장선생님께서 직접 요리한 음식으로 아이들의 점심과 간식을 제공한다는 점, 시설이 깨끗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그곳을 너무 좋아한다는 점 등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고민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 형편을 고려할 때, 이것은 과한 소비인가, 아니면 아이를 위해 꼭 필요한 투자인가.
그 당시 가난한 대학원생 부부가 감당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비용이었습니다. 월 교육비 자체는 주변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었지만, 교구(레고 블록)를 구매해야 해서 목돈이 드는 상황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저는 아이를 좋은 곳에 보내고 싶은 욕심과 경제적 현실 사이에서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이가 좋아하는 것, 아이가 흥미를 보이는 것"이라는 이유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레고 교육센터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사교육 정글 속으로 한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 형편을 생각해 봤을 때, 아이의 어린이집 선택은 정말 여러모로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결정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많이 힘들었지만, 아이에게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고, 값진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년간의 레고 교육센터 생활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사교육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고 표현은 하였으나, 보육 기관이고 소수정예다 보니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하고 사회성을 기르는 데 있어 선생님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고, 기대했던 대로 유아 교육에 레고놀이를 접목하는 창의적인 수업이 많아 아이의 성향에도 잘 맞았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는 몸과 마음이 쑥쑥 자랐고,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력은 물론,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형성되었습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는 동안에도 집에서는 다음날 등원 준비(알림장 확인, 준비물 확인, 가방 챙기기 등)를 하는 것 외에는, 여전히 학습적인 부분은 손대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가 원하는 실내외 놀이와 책 읽기 등을 하면서 보내는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2년이 흘렀고, 다시금 고민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열한 번째 고슴도치 시선] 생후 13개월부터 아이가 애정했던 망토(=보자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TV 속 번개맨의 망토가 멋있어 보였는지, TV를 보다 말고 갑자기 의뢰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만 3세).
"<계약서> 외할머니는 O일 O일까지 OO이에게 번개맨 망토와 장갑을 만들어 주시오. 계약을 어길 시에는 5,000원을 벌금으로 내시오."
의뢰서라는 말을 몰라 계약서라고 쓴 아이의 첫 망토 주문서는 친정엄마께 잘 전달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직접 쓴 손자의 계약서를 받으신 친정엄마께서는 "이렇게 일방적인 계약서는 처음 본다."라고 하시면서도, 멋진 재봉 솜씨로 별그림이 그려진 검정 망토를 직접 만들어 주셨습니다.
계약서를 써야 한다는 건 어떻게 안 것인지, 도대체 계약서 문구는 어디서 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제 아이는 관찰력과 실행력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다음 이야기] 영어유치원의 유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