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루는 대부분 저녁 설거지로 마무리된다.
젊은 시절, 그렇게도 하기 싫어하던 설거지였는데, 이제는 내 부엌, 내 살림이 되어서인지 '하기 싫다'는 마음보다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그럭저럭 하게 된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손만 바쁘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당장 오늘 일어난 일부터, 문득 떠오르는 아주 오래 전의 기억까지.
어제도 설거지를 하던 중, 아이와의 추억이 문득 떠올라 나도 모르게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들이 어릴 때, 배앓이를 자주 했다.
열이 나고 아파서 응급실에 가보면, 변비 때문인 날도 간혹 있었지만, 대체로 컨디션이 나쁘면 배부터 아팠고, 바이러스성 장염이라도 걸린 날에는 탈수 증상으로 이어져 입원까지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말하는 날에는,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그날도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아이가 전날부터 배가 아프다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핼쑥해진 얼굴로 아침 등교를 했고, 나는 그날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학교에서도 화장실을 자주 간 건 아닐까, 급식은 제대로 먹었을까, 계속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시계만 계속 흘끗거렸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따라 유난히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드디어 기다리던 하교시간이 되자, 나는 곧바로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등교하면서 선생님께 맡겼던 휴대폰을 막 돌려받았을 즈음이라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아이가 전화를 받았다.
"오늘 하루 배 상태는 어땠어?"
"배상태요? 음... 괜찮은 것 같아요."
"너무 힘들면, 방과 후 수업은 안 가도 괜찮아. 그냥 바로 집에 와."
"배상태 보고 나서 생각해 볼게요."
"그래."
아이는 배앓이가 조금 나아졌는지, 방과 후 수업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왔고, 나는 아이 저녁으로 뭉근하게 끓인 누룽지죽을 내놓았다.
점심을 대충 때웠던 건지 아이는 누룽지죽을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언제 봐도 참 사랑스러웠다.
배가 좀 불렀는지,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저녁을 마저 먹으며 학교 이야길 하기 시작했다.
"엄마, 오늘 애들이 '배상태가 누구냐'라고 물었어요."
"배 상태가 누구냐니?"
"제 동생인 줄 알았대요."
"응?? 어... 어??"

그랬다.
우리 집 남자들은 모두 '배' 씨였다.
성(姓)때문에 아이들이 헷갈렸던 것이다.
"... 성(姓)이 잘못했네."
그날 아이가 먹은 뒷정리를 하면서도, 아이와 친구들의 대화장면이 상상되어, 나도 모르게 계속 히죽거렸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혹시 아이들이 놀려 상처받은 건 아닌가 걱정되었지만, 아이는 별 일 아니라는 듯 평소처럼 어깨를 으쓱하곤 말았다.
사실, 아이가 물려받은 성(姓)은 아이 이름을 지을 때도 영 애물단지였다. 아무리 예쁘고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을 갖다 붙여도 '배'가 '배(belly)'를 연상시켜서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요즘엔 엄마 성도 따른다고 하니, 내 성을 갖다 붙였다면 어땠을까?
안된다.
내 성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특히, 그날 있었던 에피소드인 '상태'라는 단어와 붙으니 너무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성씨 중에는 이런 경우가 꽤 많은 것 같다.
생각나는 것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김 = seaweed(바다에서 나는 해조류)
이 = tooth(치아)
박 = gourd(박과 식물)
정 = chisel(정, 끌 도구)
문 = door(문, 출입구)
배 = belly(배, 복부)
강 = river(강, 큰 하천)
안 = inside(안쪽, 내부)
백 = hundred(숫자 100)
남 = man(남자)
여 = woman(여자)
금 = gold(귀금속 금)
육 = six(숫자 6)
여기에 '상태'라는 단어를 붙이면, 전반적으로 이상하게 들린다.
김 상태, 이 상태, 문 상태, 강 상태...
아이와 있었던 이 작은 에피소드는 과거의 일이지만, 어제 설거지를 하는 내내 그 에피소드가 떠올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설거지를 마칠 즈음에는 머릿속에 성(姓)씨 영어단어 사전이 한 권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날의 에피소드가 갑자기 떠오른 이유가 뭘까?
아무래도 아들이 보고 싶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