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편
아이가 학원을 다니지 않으니 좋은 점 중 하나는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이의 스케줄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유아기 때와 마찬가지로, 초등학생 시기에도 아이와 함께 많은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아이가 저학년 때는 주로 경주, 부산, 울산 등 집에서 1~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실전이야'를 모토로 아이의 인생 교육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던 아이 아빠가,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 실제로 인생은 실전임을 보여주기 위한 장기 플랜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계획은 바로, 1년 치 휴가를 최대한 모아 아이와 함께 유럽여행을 떠나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을 떠나기 전, 아이의 체력도 테스트할 겸 워밍업으로 홍콩을 3박 4일 다녀오자고도 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아이 아빠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홍콩 여행은 첫 해외 가족여행이었던 만큼, 아이 아빠가 모든 준비를 도맡았습니다. 항공편, 홍콩 현지 교통편, 맛집, 관광지, 유의사항 등 여행 일정이 시간대별로 정리된 엑셀 파일 덕분에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3박 4일간의 홍콩 여행은 대부분 순조로웠습니다. 다만, 그 당시 컨디션에 따라 배앓이가 잦았던 아이가 도보 여행이 힘에 부쳤는지, 아니면 현지 음식이 좀 기름졌는지 하루 정도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하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계획에 크게 어긋남 없이 홍콩과 인근 마카오를 둘러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계획형(J) 가족이었던 저희는, 다음 여행을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쯤으로 잡고,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약 2주간 파리, 런던, 로마를 다녀오기로 하고, 항공권과 숙소 등을 미리 예약하던 아이 아빠는 여행 한두 달 전, 아이에게 한 가지 미션을 주었습니다.
"자, 아빠가 준비했던 홍콩 여행을 참고해서, 유럽 여행은 OO이가 엄마랑 같이 세부 계획을 세워 보는 게 어떨까?"
아빠의 제안에, 아이와 저는 둘 다 당황했습니다. 특히 저는 아이 아빠의 제안이 마치 제 숙제처럼 느껴져 많이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체력과 시간, 그리고 저희의 일정까지 겨우 맞춘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이와 함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유럽 여행 관련 블로그를 뒤지고, 여행 책을 사다가 공부하며 아이와 함께 유럽에 대한 기본 정보들을 조금씩 익혀나갔습니다. 각 지역별로 가장 가보고 싶은 장소를 찾는 일은 아이에게 맡겼고, 저는 아이가 선택한 장소와 숙소 간 이동 경로를 고려해 최종 목적지를 정하고 동선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다행히, 그 당시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던 아이 아빠가 저희에게 세부 계획을 일임하긴 했지만, 맛집과 가볼 만한 곳들을 넌지시 추천해 준 덕분에 여행 준비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출국부터 귀국까지 약 2주간의 유럽 여행은,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기간이었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특히,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낯선 문화를 경험하며, 책에서만 보던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는 값진 추억이 된 것 같습니다.
여행 내내 많은 에피소드가 쏟아졌지만, 그중 몇 가지면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에피소드 1. 프랑스 파리에서의 추억]
호기심은 많지만 모험심은 부족했던 아이는, 프랑스에 도착한 첫날 새로운 음식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특히 아침 대용으로 먹던 프랑스의 다양한 빵은 거부하고, 마트에서 산 식빵만 고집해 참 난감했습니다. 하지만 강요하진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 유명하다는 빵집을 들러 빵을 사면서도, 숙소 근처 마트에 가 아이가 원하는 식빵을 사다 주었습니다.
낮동안 명소들(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대성당, 에펠탑, 개선문, 몽마르트르 언덕, 퐁피두 센터, 베르사유 궁전 등)을 구경한 후 들른 식당들의 경우에는 최대한 아이에게 익숙한 재료(홍합, 소고기 등)로 만든 프랑스 현지 메뉴를 선택해 무난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를 떠나기 전날,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들어 아이에게 프랑스 빵을 한번 더 권했습니다.
"엄마 아빠는 프랑스 빵이 너무 맛있거든. OO이가 딱 한 입만 먹어보면 좋겠다. 한 입 먹어보고 맛이 없으면 다시는 강요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한 번만 시도해 보자."
엄마 아빠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아이는 겨우 용기를 내 크로와상을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그때부터는 뭐,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더 일찍 맛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후회했습니다.
그날의 경험 덕분에, 아이는 영국과 이탈리아에 가서도 익숙하지 않은 현지 음식들을 일단 맛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음식으로 인한 고민이 한결 줄어들었습니다.
[에피소드 2. 영국 런던에서의 추억]
저희는 아이와 새로운 지역에 방문할 때마다 아이가 그곳을 기억할 수 있는 작은 기념품을 사주었습니다. 유럽 여행 역시, 각 장소마다 아이가 원하는 기념품을 사주었는데, 영국에서 산 기념품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아이의 취향을 반영한 해리포터 스튜디오, 그리니치 천문대, 빅벤, 런던아이, 제 취향을 반영한 셜록 홈스 박물관, 타워 브리지, 테이트 모던, 아이 아빠 취향을 반영한 웨스트민스터 사원, 버킹엄 궁전, 세인트폴 대성당, 대영박물관 등을 방문할 때마다 아이는 각 명소가 그려진 금빛 기념 동전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주객이 전도되어, 기념 동전을 사기 위해 명소를 찾아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여행 전, 아이 아빠가 기념품 몫으로 용돈을 정해 놓은 덕분에, 아이는 계획적으로 기념품을 고르고, 자신이 원하는 기념품은 직접 계산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에피소드 3. 이탈리아 로마에서의 추억]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로마에서는 다양한 해프닝들이 일어났습니다.
애써 찾아간 트레비 분수는 공사 중이었고, 현지 맛집이라 추천받아 간 곳은 마침 휴무일이었으며, 피자와 파스타만 먹다 질린 아이가 정작 이탈리아에서 가장 맛있게 느낀 음식은 맥도널드 햄버거였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나폴레옹 박물관'을 방문한 경험이었습니다.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진실의 입, 보르게세 미술관, 판테온, 트레비 분수, 바티칸 미술관, 산 피에트로 대성당 등을 둘러본 로마 여행에서, 나폴레옹 박물관은 원래 계획에 없던 곳이었습니다. 바티칸시국을 구경하고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중, 체력이 점점 고갈되는 아이를 배려해 잠시 들른 곳이었습니다.
우연히 들렀지만,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는 잠시 발을 쉬려고 벽 사이에 놓인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습니다. 그런데 관리인이 다가와 "그 의자도 나폴레옹이 쓰던 의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다른 전시품들은 접근 금지 표식이 있었지만, 아이가 선택한 의자는 아무런 표식 없이 그냥 벽 모서리에 놓여있어 저희 눈에도 전시품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건은 저희의 불찰이므로, 어떠한 변명 없이 아이와 함께 정중히 사과를 했습니다. 다행히 아이가 어리기도 했고,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만 살짝 걸친 상태라 관리인도 아이의 실수를 이해해 주었습니다.
아이도 많이 민망해 하긴 했지만,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는 책임을 지고 사과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배운 것 같았습니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 저희는 아이에게 여행에게 대해 따로 묻지 않았습니다. 여행 내내 아이가 보여준 모습과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만으로,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느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리와 런던에서는 호기심과 도전, 그리고 경제관념을, 로마에서는 행동과 책임, 실수 처리의 중요성을 체험하며 아이는 한층 더 성장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교과서 밖에서 배운 것들은 굳이 되새기지 않아도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라 믿습니다. 실제로 아이는 학교 수업 시간에 유럽 여행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긴 유럽 여행 이후, 저희의 가족여행은 매년 겨울여행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여의치 않아 가까운 곳 위주로 다니고 있지만 말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제가 아이 아빠보다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자랄수록, 남자 아이라 그런지 아빠의 역할과 존재감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다소 이른 시기에 시작된 아빠의 '인생 실전 트레이닝' 덕분에, 아이는 어릴 때 많이 울고 힘들어했지만, 아빠의 계획대로 좌절도 경험하고, 잘 지는 법도 배우면서 회복탄력성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빠와의 케미는 점점 좋아졌고, 지금도 아이는 아빠와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른한 번째 고슴도치 시선]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인 6학년 때 아이가 받은 '학교생활기록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6학년 1학기 : 논리적이고 자기의 생각을 잘 표현하며 사고력이 풍부하여 실험 방법과 결과도 잘 추출함. 구체적인 자료를 학습에 활용할 줄 알고 학습과제를 성실하게 하며 바른 학습 태도로 수업에 임하므로 전 교과 성취도가 높아 더 큰 발전이 기대됨. 학급 규칙을 잘 지키며 자존감이 높고 긍정적인 태도로 생활하여 교우 관계가 원만함.
6학년 2학기 : 기본 학습이 잘 되어 있어 교과 문제 해결력이 뛰어나며 수업 중에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잘 드러내고 이해력과 논리적 사고력이 좋아 학업 성취도가 고루 우수함. 순발력이 좋고 민첩성이 높아 체육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스포츠 예절을 잘 지킴. 다양한 독서로 상식이 풍부하고 논리적 비판력이 돋보이는 글을 잘 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고 매사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넘침.
[다음 이야기] (에필로그) 자기주도학습, 그 시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