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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깍두기

초등 편

by My Way

2021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돼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오징어게임'에는 한국의 정서를 드러내는 다양한 문화가 녹아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국에만 있다는 '깍두기 문화'는 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하는데, 약자를 소외시키지 않고 배려하는 우리의 놀이 문화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대대손손 이어지고 있나 봅니다.

제 아이도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엄마는 깍두기'라며 저를 놀이에 끼워준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초등학생, 특히 남자아이들의 놀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게임'이 아닐까 합니다. 간혹 게임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야말로 천연기념물(?) 같은 아이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스마트폰이나 PC, 콘솔 게임 등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4학년쯤 되자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친구들이 많아졌고, 아이도 차츰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 아이는 모바일보다는 PC 게임을 더 좋아했는데, 특히 마인크래프트를 무척 재미있어했습니다.


하지만, PC 게임의 세상이 펼쳐지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좋았던 아이는 이제 놀이터가 아닌 PC방으로 향하는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싶어 했습니다. 아이의 교우 관계와 방과 후 루틴을 두고 고민하던 저는 몇 번 친구들과의 PC방 행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PC방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는지, 아이들은 저녁식사까지 그곳에서 해결하며 늦게까지 게임을 즐기곤 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의 PC 게임은 허용하되, 저녁식사 전까지는 반드시 집에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을 항상 걸었습니다. 이곳으로 이사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빠와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친구가 소중하다는 건 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과의 약속'임을 늘 상기시켰습니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은 PC방에서 놀다가 학원으로 바로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 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아 밤늦게 혼자 거리를 돌아다닐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PC 게임을 위해 밤늦게 외출한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끝까지 남아 게임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아쉬워했지만, 엄마 아빠의 말을 잘 따라주었습니다. PC방 방문으로 흐트러졌던 루틴도 저녁식사 후 공부방에서 마무리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PC방 사랑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제 아이는 가끔 친구들과 어울렸는데, 제게 허락을 구할 때마다 저는 교우관계를 위해 허용해야 할지, 아니면 절제를 시켜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아이 아빠도 아이가 PC방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허락해 주는 이유에는 십분 공감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던 중, 아이 아빠가 갑자기 최신 사양의 컴퓨터와 게임용 마우스, 키보드, 헤드셋을 사다가 '공부방'에 설치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걸로 될까?'


사실, 저는 회의적이었습니다. PC 게임이 주목적이긴 하겠지만,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한다는 것이 아이에게는 더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의의로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번쩍거리는 키보드와 그 당시 PC방에 버금가는 성능의 새 컴퓨터가 아이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들, 친구들과 게임은 하되, 가능하면 PC방 말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연결해서 하면 좋겠어. 대신 시간을 정해서 하고, 약속한 시간이 되면 스스로 게임을 끝내기로. OK?"


그렇게 PC방 문제는 해결이 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집에서 친구들과 온라인으로 게임을 즐기기 시작한 아이는, 좀 더 제대로 된 게임 프로그램을 깔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게임 전용 PC는 아빠가 준비한 뜻밖의 선물이었지만, 게임 프로그램은 아이가 갖고 싶은 물건이다 보니, 다시 한번 '아빠를 설득(16화 참조)'하는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드웨어를 선물한 아빠로서는 아이의 요구를 쉽게 외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빠 입장에서는, '게임을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환경에서 할 수 있게 배려해 준 것인데...'라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이가 과한 요구를 한다고 느낄 수 있었겠지만, 아이의 설명을 끝까지 경청했고, 결국 설득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대신 '각서'를 쓰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아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각서는 "앞으로 다시는 게임 프로그램을 사지 않겠습니다."라는 단순한 내용이었고, 서로 사인까지 한 후 냉장고 한쪽에 붙여 두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정확하게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몰랐고, 그 각서가 아이와 아빠 사이에 감정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기에 굳이 끼어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서를 쓴 뒤, 정당하게 프로그램을 선물로 주고받아서인지, 아이도 아빠도 게임과 관련해 더 이상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후 아이는 PC 방보다 주로 집에서 친구들과 게임을 즐기게 되었고, 아빠와의 약속대로 시간을 잘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다만 게임 특성상 종료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몇 가지 규칙을 정했습니다.


첫째, 한 시간 게임을 기본으로 한다.

둘째, 시작한 판이 10분 안에 끝날 수 있다면, 1시간 10분까지 허용한다.

셋째, 한 시간 전에 게임이 끝나고 다음 판을 시작하기 애매할 때는, 남은 시간을 다음 게임 때 사용할 수 있다.


가끔은 아이가 게임을 하고 싶은데, 함께할 친구가 없으면, 제게 '깍두기'를 시켜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아이가 좋아하는 마인크래프트를 잘 다루지 못했지만, 아이는 제 실력을 배려해 쉬운 것들만 가르쳐주었습니다.


"엄마, 저기 앞에 땅 좀 파 주세요."

"엄마,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벽돌을 이렇게 쌓으시면 돼요."

아이는 혼자 게임을 하는 것보다, 깍두기인 저라도 옆에 있어 가르쳐 가며 하는 게 더 재미있는지 가끔 묻곤 했습니다.


"엄마, 마인크래프트 할래요?"


아이의 마인크래프트 사랑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새로운 게임인 롤(리그 오브 레전드)을 하게 되면서 제 '깍두기' 역할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아빠가 제 자리를 차지해 아이의 롤 게임 파트너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빠도 아이의 깍두기였던 걸까요?


남자아이와 '게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는 저희를 친구의 대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깍두기'로 대했을지 모르지만, 저희는 아이와 함께 게임을 하면서, 아이의 게임 취향도 알게 되고 대화 거리도 늘어나 좋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아이와 아빠가 TV로 롤 경기를 보며, "T1(e 스포츠팀)이 어쩌고 페이커(프로게이머)가 어쩌고" 하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면, 어릴 때 온라인 게임을 함께 한 경험이 단순한 놀이 이상의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온라인 게임을 매개로 한 소통이 게임 중독을 막고 게임으로 인한 갈등을 줄이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아이의 성향이나 가정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최신식 사양 컴퓨터를 들이기 전, 집에서 혼자 PC 게임 중]




[스물아홉 번째 고슴도치 시선] 제 아이는 학교 방과 후 수업으로 듣던 '과학실험수업'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집에서도 직접 과학실험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아이의 간절한 바람을 들은 산타할아버지(?)께서 과학실험 키트를 선물해 주셨고, 그날 이후 아이는 자신의 방에 작은 실험실을 꾸며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무언가를 열심히 실험했습니다.

청소를 하러 들어가 보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흰색 곰팡이, 파란색 곰팡이가 생겨있는 시험관이 있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이가 '버려도 된다'라고 하지 않는 한 그대로 두었고,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가 혼자 기록하고, 조합하고, 실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이만의 실험은 중학교 입학 전까지 계속되었고, 어느 날 실험이 끝났다고 하기에 아이와 함께 모든 실험 기구를 깨끗이 씻어 방에서 치웠습니다.

그런데, 그 실험은 과연 성공이었을까요? 실패였을까요?

최근에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아이에게 그 실험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아이 말에 따르면, 집에 있는 화장품과 알코올 등을 조합해 좋은 향이 나는 물(향수)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비율도 바꾸고, 재료도 바꿔보았으나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집에 있는 거의 모든 재료를 다 써본 뒤, 실험이 실패했다고 판단되어서 중단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아하, 그런 거였구나!'

그렇게, 아이의 비밀(?) 과학 실험은 약 10여 년 만에 베일을 벗었습니다. 제 아이는 비록 초등학생이었지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탐색하며 기록을 남기는 호기심 많은 꼬마 연구자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 이야기] 인생은 실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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