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편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 저희도 각자가 살아온 환경이 달라 아이 육아와 교육에 대한 의견 차이가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했기에, 나름 현명하게 절충하면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가 아이의 교육을 도맡아 제 기준대로 아이를 키운 것 같겠지만, 사실은 아이 아빠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늘 곁에 있었습니다. 때로는 아빠의 가치관과 기준이 어린 아들에게 너무 과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빠에게는 다 그럴만한 이유와 계획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 아빠에게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주말마다 저희 집은 '불꽃 튀는 경쟁의 장(場)'이 되곤 했습니다. 매주 펼쳐지는 보드게임 때문이었는데, 이게 뭐라고 어찌나 치열한지. 아빠에게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는 어린 아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느라 저는 늘 노심초사였습니다.
아이와 함께 한 저희 가족의 첫 보드게임은 '부루마불'이었습니다.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만큼 말을 움직이며 땅과 건물을 사는,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게임 말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보드 게임을 한 날, 아이 아빠는 단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땅과 건물을 사 모으더니 결국 아이를 파산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는 계속 아빠에게 돈을 내고, 샀던 땅을 다시 팔아야 했습니다. 억울함에 울음을 꾹 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제 눈에는 보였지만, 아이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실전이야."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어린데, 조금은 봐주면서 하면 좋으련만, 아이 아빠는 "인생은 실전"이라며 아이의 경쟁심을 자극했습니다. 결국 아이는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꾹꾹 참다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울면서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아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게임을 정리하는 남편 사이에서 저는 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OO이 속상하지? 근데 아빠는 어른이고, OO이는 아직 어리니까 지는 게 당연해. 그렇지만, OO이가 아빠를 이기고 싶으면, 엄마랑 같이 연습도 하고 전략도 짜보자. 아빠를 이길 수 있게 엄마가 도와줄게."
게임은 게임일 뿐이지만, 아이가 펑펑 우는 이유를 저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아이 아빠는 아이가 울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게임에서 이긴 건 사과할 이유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말이죠.
즐겁게 시작한 저희 가족의 첫 보드게임은 그렇게 파국으로 끝났지만, 아이는 그 이후에도 아빠에게 계속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승부욕이 강했던 아이는 어떻게든 아빠를 이겨보려고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주사위 운과 약간의 전략으로 승패가 좌우되는 게임에서 아빠를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게임이 끝나면 아이는 언제나 "아빠, 미워!"를 외치며 서럽게 울면서 방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이 아빠는 단 한 번도 일부러 져주지 않았습니다.
'으이구, 진짜...'
이후, 아이는 종목을 바꿔 바둑, 장기, 체스, 포커, 블로커스 같은 두뇌 게임으로 아빠에게 도전을 했고, 수많은 패배를 겪으면서 아빠에게 져도 더 이상 울지 않는 경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결국엔 아빠를 넘어서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아이의 실력이 어느 정도 올라가자, 아빠는 더 이상 아이의 승부욕에 불을 지피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아빠에게 이기겠다는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는데, 아빠는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게임에 임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일부러 져주는 일은 없었지만 말입니다.
아빠와의 보드게임을 평정한 아이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실력이 쑥 올라 학교에서도 보드게임을 가장 잘하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특히 바둑, 장기, 체스, 포커 같은 게임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혹시 이것도 다 아빠의 계획이었던 걸까요?
사실 그 당시에는 보드게임을 할 때마다 아이를 울게 만드는 아이 아빠의 방식이 정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성향을 분명 알고 있었기에, 게임에서 지면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 아빠가 왜 그렇게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아이가 자라면서 겪게 될 험한 세상에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룰과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가르치며, 나름 인생을 배우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꿈보다 해몽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그 당시 아이 아빠의 방법이 아이 연령에는 다소 거친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긴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아이가 충분히 이겨낸 것을 보면, 그 방법이 제 아이 성향에는 잘 맞는 방법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엄마 아빠의 다른 성향과 교육관이 아이에게는 마이너스 요인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고학년이 된 이후에는 아빠와 함께하는 활동 대부분이 스포츠에 치중되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저보다 더 저질체력인 것 같았던 아이 아빠도, 아들과 함께하고 싶은 로망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전거를 타러 나갔고, 야구라기보다 캐치볼에 가까운 놀이를 즐겼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인라인 스케이트도 가르쳐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한 실외 스포츠는 단연코 '축구'였습니다. 둘은 골키퍼와 공격수로 나눠 승부차기 형식의 축구를 자주 했는데, 이때도 아이 아빠는 아이의 공을 죽자고 막아냈습니다. "갓 핸드!"를 외치면서 말이죠.
도대체 이 남자 왜 이러는 걸까요? 아빠들은 다 이러는 걸까요?
아빠에게 지는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울던 아이는, 어느새 아빠의 인생 실전 트레이닝에 단련되었는지, 기술을 연습하고 익혀 정당하게 이겨보려는 노력을 이어가면서도, 지는 것에 대해서는 점점 무덤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인생 실전 연습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른 번째 고슴도치 시선] 저희가 아이에게 휴대폰을 사 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전학 이슈가 있었고, 저 또한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되어 부득이 아이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고학년이 되면서는 친구들과 비슷한 성능의 스마트폰을 사주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희도 휴대폰으로 인한 갈등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사용 시간을 설정하거나 휴대폰을 빼앗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계륵 같은 존재이긴 했지만, 휴대폰은 분명 아이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스스로 절제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규칙을 함께 정하고 지켜나갔습니다.
공부방에는 휴대폰을 들고 들어가지 않는다.
밥 먹을 때 휴대폰을 보지 않는다.
잠잘 때 휴대폰은 거실에서 충전한다.
이상한 사이트에 가입하지 않고, 의미 없는 단톡방(오픈 단톡방)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특히 네 번째 규칙의 경우, 아이 아빠가 눈여겨보며 가끔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이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휘둘릴 수 있는 상황에 대해 늘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동시에, 휴대폰 없이도 즐길 수 있는 활동들을 늘려나갔습니다. 책을 함께 읽고, 보드게임을 하고, 밖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도 틈틈이 이어갔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이도 휴대폰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습니다. 제 생각에 자기주도학습은 결국 휴대폰을 얼마나 절제할 수 있느냐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제 아이는, 스스로의 의지대로 절제하려 노력하면서 자기 주도성을 조금씩 키워나가던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 이야기] 교과서 밖에서 배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