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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그 미스터리한 실력의 비밀

초등 편

by My Way

과학고등학교 입학을 꿈꾸는 한 어린 친구가 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카이스트는 수업을 영어로 하나요?"


요즘은 4년제 대학들 중에도 영어로 수업하는 강좌들이 간혹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를 비롯해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GIST(광주과학기술원), UNIST(울산과학기술원) 같은 과학기술특성화대학들은 거의 대부분의 수업이 영어로 진행됩니다.


아이는 과학고에 진학해 영어로만 진행되는 수업을 접한 뒤, 영어의 중요성을 몸소 실감한 듯했습니다. 그래서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는 지금까지도 영어 공부만큼은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 아이의 초등학교 시절 영어는 어땠을까요?

그때 아이의 실력을 보여주는 작은 에피소드 두 가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에피소드 1]

"아빠, 우리 투스레스주스 가요."

오랜만에 저녁 산책을 나온 날, 아이가 생전 처음 듣는 말을 하며 손가락으로 어느 가게를 가리켰습니다.

그곳에는 '뚜레쥬르(TOUSlesJOURS)'가 있었습니다.


[에피소드 2]

"아들, 살면서 좌우명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사는 게 좋아. 근데, 좌우명이 영어로 뭐게?"

아빠의 질문에 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Left, Right, Name."


이것이 초등 고학년 시절, 제 아이의 영어실력이었습니다.

저희는 아이의 엉뚱한 대답에 박장대소를 했고,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종종 웃음이 납니다.


선배 언니들의 조언(12화 참고)에 따라 초등 고학년공부법점검할 때, 영어 과목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영어는 학습 이전에 '언어'이기에, 저는 언어로서의 영어와 학습을 위한 영어는 구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영어에 대한 관심

제 아이가 영어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영유아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1편 10화 참조). 문화센터를 다니던 27개월 무렵, 알파벳과 영어 노래를 접하면서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보통은 아이가 관심을 보이면 바로 반응했지만, '영어'만큼은 망설여졌습니다. 우리말이 아직 서툴던 아이에게 두 언어를 동시에 접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이의 관심이 계속되자, 결국 34개월 무렵 영어 전공자인 막내 동생에게 부탁해 '영어 놀이 시간'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모표 놀이 영어'는 시간이 지나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바뀌었고, 아이가 카이스트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둘째, 초등 입학 전 영어 실력

'이모표 놀이 영어' 외에 아이가 접할 수 있었던 영어 환경은 집 벽에 붙여 둔 영어 알파벳 포스터어린이집, 유치원에서 배우는 영어가 전부였습니다.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에 많이 노출되어야 한다는 말을 저도 종종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영어유치원의 유혹(1편 13화 참조)을 뿌리치면서, 제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에게 남은 건 주 1회, 30분 남짓 이어졌던 '이모표 놀이 영어'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생이 된 아이는, 알파벳과 파닉스(Phonics) 정도만 접해본 상태에서 3학년 첫 영어 수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언어로서의 영어 vs. 학습으로서의 영어

영유아기부터 시작된 '이모표 놀이 영어'는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단순히 영어와 친해지는 단계를 넘어섰습니다. 그렇다고 학교 수업과 직접 연결된 것은 아니었고, 언어로서의 영어에 더 비중을 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파닉스를 점검하고, 영어 동화책을 읽고, 영어 일기를 쓰고, 부족한 실력이지만 간단한 주제로 일상 대화를 나누는 등의 활동들로 말입니다.

반면, 학습으로서의 영어는 학교 수업을 충실히 듣고, 숙제를 착실히 해가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단어 시험이 있으면 하루 전날 외워갔고, 별도로 영단어를 외우거나 문법 공부를 하진 않았습니다.

사실, 제 방식대로라면, 초등 영단어 책과 문법 책을 사서 공부를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원하지 않았고, 초등학생이었던 만큼 아이가 필요로 할 때까지 기다려주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초등 고학년 영어 과목 역시, 사교육 없이도 충분히 해 나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제가 개입을 했어야 했을까요?

결과론적으로 보면, 제 기다림이 아이의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영어 실력은 여전히 미스터리합니다. 왜냐면, 아이는 이후에도 문법을 따로 공부하지 않았고, 친구들이 영단어를 작은 수첩에 적어 틈틈이 외울 때도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 과목 성적이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대학까지 진학했고, 카이스트 졸업 직전 처음으로 친 TOEIC에서 의외의 실력을 보여주며 영어 '공부'에 대한 제 걱정을 완전히 덜어갔습니다.


미스터리한 아이의 영어 실력을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면, 학습으로서의 영어가 아닌 '언어로서의 영어'에 꾸준히 집중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아기를 제외하더라도,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2년과 대학 졸업 4년까지 총 15년간, 매주 30분이란 시간을 언어로서의 영어와 접해 왔으니 말입니다.

물론, 원어민 수준의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만큼 활용이 가능하고, 이제는 이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AI의 발달로 영어의 필요성이 줄었다고 하지만, 제 생각엔 아직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라 하더라도, 초등학생 시절부터 영어를 언어로 받아들이는 힘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스물일곱 번째 고슴도치 시선] 이모표 영어가 초등학생 맞춤으로 바뀌면서 아이는 영어를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영어로 말하고 쓰고 읽는 활동을 잘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습니다.


"OO이는 국어 어휘력이 너무 좋아서, 그걸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자꾸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내 생각엔 이 정체기만 잘 넘기면 어느 순간 말문이 갑자기 트일 것 같거든."


제가 보기에도,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껴 좌절하는 것 같았습니다. "잘하니까 좋아한다(13화 참조)"던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아 영어를 싫어할까 봐 노심초사했지만, 동생의 피드백을 받으며 아이의 영어 실력이 영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정체기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꾸준히 이모와의 영어 시간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숙성한 끝에,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말문이 트이는 순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앞에서는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 이야기] 아빠를 설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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