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포자가 뭐예요?

초등 편

by My Way

과거의 기록과 기억이 뒤섞여도 또렷이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특히 아이와의 대화가 그런 것 중 하나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하나 꺼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OO이는 어떤 과목을 제일 좋아해?"

"저는 수학이랑 과학이요."

"왜 좋아?"

"잘하니까요."


저는 아이의 저 대답을 듣고 잠시 멍해졌습니다.

제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저는 국어 과목을 가장 좋아했고, 그래서 더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잘하게 된 것 같거든요.

그런데 아이는 좋아해서 잘하는 게 아니라, 잘하니까 좋아한다고 하니...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은 아이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승부욕이 강해서, 무언가를 잘하면 자신감이 붙고, 그 자신감이 곧 애정으로 이어지며 더 큰 동력이 생기곤 했습니다. 대체로 아이의 공부는 그런 식으로 선순환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못하는 과목은 싫어하는가? 그래서 악순환이 일어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전학 온 학교는 아이들을 줄 세워 평가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아이의 수준을 정확하게 가늠할 순 없었지만, 아이는 '좋아하려면 잘해야 한다'라고 생각해 늘 열심히 했고, 잘하면 기분이 좋아 더 잘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덕분에 초등학교 공부가 크게 어렵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집중해 듣다 보니, 새로운 개념도 비교적 수월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수학이 특히 그랬습니다.


선배 언니들의 조언(12화 참조)에 따라 초등 고학년 과목들의 공부법점검하면서 가장 신경이 쓰였던 부분은 단연 '수학'이었습니다.

초등 저학년 때까지는 교과서 방식 그대로, 외우기보다는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고 문제를 푸는 방식을 고수해 왔는데, 이 방법이 초등 고학년 수학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4학년쯤 되면 수포자가 생긴다던, OO이는 수학 수업이 어렵진 않아?"

"수포자가 뭐예요?"


다행히도, 아이는 '수포자'라는 말조차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학교 선생님들 덕분에 수학 개념이 탄탄히 잡혀 있어서 그런지, 오히려 수학을 재미있어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초등 고학년이 되었으니 개념서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싶어 참고서 외 문제 풀이집을 하나 더 사 주었습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을 풀자는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복습하는 시간에 개념서를 읽은 뒤, 한 두 문제쯤 확인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수학 공부를 봐주면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첫째, 수학 풀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제가 보기엔 중간 과정 정도는 생략해도 될 듯한데, 아이는 매 단계 차근차근 풀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풀이방식에 대해서도 꽤 오랫동안 고민하는 것 같았습니다. 답을 알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싶은 과정들을 두고 한참을 생각하는 아이를 기다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모범답안을 참고해 "이렇게 푸는 거야."하고 가르쳐 보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왜?"라는 질문이 늘어났습니다.


둘째, 납득이 되지 않으면 넘어가질 않았습니다.

영유아기 때의 끝없는 질문 시기(1편 11화 참조)도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비교적 수월하게 잘 지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초등 고학년이 된 아이의 "왜?"라는 질문은 훨씬 집요하여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종종 생겼습니다. 저는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자 모범답안을 제시했지만, 아이는 "왜 그렇게 풀어야 해요?"라며 원리를 더 궁금해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맞다, OO이는 빠르게 푸는 것보다 이해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아이였지. 내가 공부하던 방식은 아이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저는 다시 아이의 속도에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초등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아이의 이런 수학 공부 방식을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저는 빠르게 문제 푸는 것에 욕심을 부리게 된 걸까요? 중요한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수학 성적에 따라 무슨 큰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아이는 그저 학년만 올라갔을 뿐 변한 게 없는데, 아이의 고유한 공부법을 바꾸려 한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제 욕심을 내려놓고,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오롯이 아이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다시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수학 공부는 학교 선생님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참고서로 개념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개념을 확인한 뒤엔 참고서의 연습문제를 풀었고, 채점을 통해 틀린 문제를 확인했습니다. 단순 실수라면 그 문제를 한번 더 푸는 것으로 마무리했고, 이해가 안 된 거라면 다시 참고서로 돌아가 개념을 확인했습니다.


처음엔 그런 모습이 느리고 융통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만의 속도라고 생각하며 찬찬히 들여다보니, 나름의 루틴을 가지고 문제 하나하나를 정성껏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인 문제들은 온전히 아이의 것이 되었습니다.


제 아이의 방법이 100%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많은 문제를 반복적으로 풀어보는 것이 더 맞는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제 아이는 암기보다는 이해, 양보다는 질에 가까운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많은 유형의 문제를 빠르게 푸는 것보다,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고 단 한 문제라도 제대로 푸는 데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초등 고학년 '수학' 역시, 아이의 방식대로 유지되는 것이 맞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스물다섯 번째 고슴도치 시선] 초등 5학년 때 아이가 받은 '학교생활기록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5학년 1학기 : 수업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진지하고 자신의 의견을 꾸준히 제시할 줄 아는 야무진 학생임. 특히 발표할 때 적절한 목소리와 어조로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음. 관심 있는 일에는 욕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려는 태도를 지님. 질서와 규칙을 잘 지키고 책상 주변 정리 정돈하는 습관이 형성되어 있음.

5학년 2학기 : 논리적이고 자기의 생각을 잘 표현하며 사고력이 풍부함. 운동신경이 좋고 체육 활동을 즐기며 승부욕을 지님. 주어진 규칙을 잘 지키고 명랑 쾌활한 학교 생활을 하며 근면 성실함.




[다음 이야기] 자칭 과학 영재(?) 소년

keyword
이전 12화네 가지(?)가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