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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맘 로그아웃

초등 편

by My Way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학년이 바뀔 때마다 학교에 제출하는 기초조사서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온라인으로 작성한다고들 하던데, 그곳에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항목이 바로 '아이의 장래 희망''부모님이 희망하는 진로'였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빈칸을 어떻게 채우십니까?


저는 매번 같은 답을 적었습니다.

축구선수, 마술사, 대통령, 과학자 등 아이의 꿈은 학년마다 달라졌지만, 저는 언제나 '아이와 동일'이라고 썼습니다. 아이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응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꿈을 이루는 길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자녀 교육의 성공 조건* 중 하나라는 엄마의 정보력만큼은 갖추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혼자서 알파맘 되기 프로젝트(02화 참조)를 실행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 자녀 교육의 성공 조건(풍자) :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그런데, 전학이라는 변수가 생기면서,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모든 인맥과 정보가 한순간에 리셋되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곳에서 새롭게 '알파맘 되기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기엔 장벽이 너무 높았습니다.


우선, 1학년때부터 이미 굳어진 엄마들 모임에 들어갈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직은 이방인의 처지다 보니, 학부모운영위원 자리에 공백이 있어도 선뜻 기회를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이가 저학년을 넘어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줄었고, 무엇보다 이 학교는 엄마들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아이가 학급 임원이라도 맡으면 학교 상황을 조금 더 가까이서 알 수 있을 텐데, 제 아이가 전학 후 달라졌습니다.


이전 학교에서는 어린이집, 유치원, 같은 아파트라는 이유로 이미 끈끈하게 유대가 형성되어 있는 아이들 틈에서, 학급 임원이 되어 보겠다고 고군분투하였던 아이가, 이곳으로 옮겨온 뒤에는 그런 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분명 학교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치 원래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처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듯했습니다.


"OO아, 이번에도 학급임원에는 관심이 없어?"

"네."

"왜?"

"저는 학급임원인 아이들이랑 친해서, 굳이 임원이 아니어도 제 의견을 낼 수 있어요. 그리고 친구들이 저를 필요로 하면 그냥 도와주면 되고요."


아이는 이전 학교에서 나름 혹독한 경험을 겪으며 '책임'의 무게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학급의 대표가 되기보다는, 학급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원으로 남는 길을 선택한 듯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알파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창구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고민만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사 후유증을 앓고 있던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전학으로 잃은 것이 많아, 아이가 힘들어할 거라 예상했지만, 아이는 오히려 훨씬 자유롭고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빠 역시 출퇴근 시간이 1/3로 줄어들면서,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는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아, 나만 욕심을 내려놓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였구나.'


뒤늦은 깨달음에,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왔지만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던 알파맘 프로젝트에서 완전히 로그아웃하기로.


그랬더니, 놀랍게도 모두가 훨씬 편안해졌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이의 학교 정보를 얻기 위해 안달할 필요도 없었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힘들었던 일들을 억지로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학부모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는 다하기 위해 한쪽 눈과 귀를 열어 두고, 학교에서 보내오는 가정통신문과 소식들을 꼼꼼히 챙겼습니다.


알파맘 되기 프로젝트에서 스스로 로그아웃한 뒤, 저에게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덕분에, 아이를 한 발짝 떨어져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확실히 전학 이후, 아이에게는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아이가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장래 희망이 매년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거라는 꿈,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꿈, 그리고 이곳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언제나처럼 기초조사서에 '아이와 동일'이라고 적어 아이의 꿈을 응원했지만, 마음가짐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아이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엄마의 정보력을 키우려는 억지스러운 일 대신, 아이 뒤에서 아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을 조용히 서포트하는 역할로 바뀌었습니다. 아이가 정보가 필요하다면 찾아주고, 방과 후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면 신청해 주고, 공부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곁에서 아이의 학습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존중하며 한 발 뒤로 물러나 있자, 새로운 환경에서도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고 자신만의 일상을 유지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전에 형성한 루틴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아이를 위해 최대한 변화를 줄여주고자, 아이의 방과 공부방을 이전 집과 똑같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시작한 루틴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켜 나갔습니다(03화 참조).


이제 '학교 숙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는 원칙은 확실히 자리 잡아서 집에 돌아오면 공부방에서 숙제부터 했습니다.

숙제를 마치면 다음날 학교 갈 준비를 했습니다. 여전히 느긋하게 책가방과 준비물을 챙겼지만, 점차 혼자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책가방을 싼 뒤에는 다이어리를 꺼내 일일 다이어리를 썼는데, 이제는 기본 일정 외에 학습 계획도 추가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다음날 하교 후, 수학, 과학, 국어 중 어떤 과목을 공부할지 정하고, 그 과목 참고서의 기본 개념을 읽어보는 정도의 공부 계획이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복습하는 시간이 추가되었지만, 간단한 시험이라도 있을 때면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은 모두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시험공부 모드로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는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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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저학년 때 들인 습관은, 아이가 고학년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덕분에 학습적인 부분에서 큰 어려움 없이 새로운 과목과 내용에도 자연스럽게 적응하며 안정적인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스물세 번째 고슴도치 시선] 초등 3학년때는 전학 이슈가 있었던 해입니다. 그때 받은 아이의 '학교생활기록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반에는 아이도 나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학년 1학기 :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항상 성실하게 하고자 노력하고 학습장 정리를 깔끔하게 잘하며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잘 적어오는 학생임. 영리하여 학습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학업 성취도도 높은 학생임. 초반에는 친구들과 사귐에 있어서 시행착오를 겪는 모습이 보였으나 지금은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지내며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항상 재미있는 놀이를 하며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음.

3학년 2학기 : 조립활동 및 탐구 조사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보고서 작성을 잘함. 일기와 국어시간에 글을 보면 자신의 생각을 개성 있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문장력이 좋음. 용의가 항상 단정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함. 도전 의식이 있고 승부욕도 넘치는 학생임.




[다음 이야기] 네 가지(?)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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