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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과학 영재(?) 소년

초등 편

by My Way

아이의 초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학군지에서 보낸 격동기와 전학 후 맞이한 안정기로 나누어집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남과 비교하지 않고, 아이 그 자체만 바라보며 아이의 속도에 맞추려는 '노력'을 부단히 했습니다. 그렇게 '줏대를 가지고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조금의 자극에도 쉽게 흔들리곤 했습니다.

그날도 완전히 로그아웃했다고 생각했던 '알파맘 되기 프로젝트(02화 참조)'가 불현듯 다시 로그온 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행사가 거의 없던 이 학교에 적응해 가던 어느 날, '과학 수업 보조가 필요하다'는 안내문이 왔습니다. 알파맘 같은 열정은 한풀 꺾였지만, 그래도 학교 정보에 목말라 있던 저는 망설임 없이 자원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OO이 엄마,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근데, 처음 뵙네요. 혹시 OO이는 어느 영재원 다녀요? "


위험한 약품을 다루던 과학 실험 수업을 무사히 마친 직후, 반장 엄마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더니, 대뜸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영재원... 이요?"

"울 딸 말로는 OO이가 과학을 잘한다던데요? 4학년이니 과학 영재원 같은데 다니지 않나요?"


사실, 저는 그날 처음으로 '영재원'이란 단어를 들었는데, 그 순간 제 마음속에 꺼져 있던 '알파맘 되기 프로젝트'가 재부팅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눈이 번쩍 뜨이고, '영재원'이 대체 뭔지 궁금해졌습니다.

조사해 보니, 정말 다양한 '영재원'이 존재했습니다.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곳부터 대학에서 주관하는 곳까지, 심지어 그 영재원에 들어가기 위한 별도의 준비 학원까지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에게 저는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친구들은 영재원에 다닌다던데, OO이는 영재수업, 받아보고 싶지 않아?"

"영재 수업이요? 음... 영재 수업은 영재가 되고 싶은 애들이 듣는 거 아니에요? 저는 이미 영잰데요?"


아이의 걸작 같은 대답을 듣고 저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해맑게 웃으며 스스로를 영재라 믿는 아이를 저도 그냥 믿어주고 싶어 졌습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나려던 제 맘 속 '알파맘 되기'의 불씨는 그날 마지막 빛을 잃고, 결국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영재원' 이야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고, '영재원 해프닝'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뜻밖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과학실험대회 참가 신청을 했어요."


전학 이후, 아이는 학급 임원, 대회, 상, 성적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저 '과학책'과 '과학실험수업'만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회 참가를 하겠다고 해 저는 좀 의아했습니다.

아이 말에 따르면, 일주일 뒤 열리는 교내 대회에서 1, 2등을 하면 시 대회 출전권이 주어지는데,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1, 2등은 OO 영재교육원을 다니는 애들'이라는 예상이 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1등은 제가 될 것 같거든요. 제 주변에 저보다 과학 잘하는 애가 없어요. 아무래도 애들이 제 실력을 모르는 것 같아서 대회 한번 나가보려고요."


그 말을 들은 아이 아빠와 저는 아이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는 티 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겠다는 시도 자체가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해 응원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예상과 달리 아이의 일상엔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1등은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제 눈엔 과학실험대회 준비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평소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Why?' 시리즈 과학책만 꺼내 읽을 뿐이었습니다.


"뭔가 생각이 있어서 저러는 걸까?"

"일단, 지켜보자. 저러다 본인 실력이 생각만큼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경험일 거야."


아이 아빠와 저는 결국 그냥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교내 대회에 나가겠다는 것도, 1등을 하겠다는 것도 모두 아이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니까요. 다만 제 마음 한 켠에는 걱정이 남았습니다. 혹시 아이의 실력이 스스로의 기대에 못 미치면, 자존감이 꺾이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1주일 뒤, 아이는 교내 대회를 치르고 왔고, 결과는 열흘 후 나왔습니다.


[초등 고학년] 과학실험 방과 후 수업 중


아이는 공언한 대로 1등을 했습니다.

영재교육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가 교내 과학실험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자, 아이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1등을 할 거라 생각했던 아이의 부진과 제 아이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학교 대표가 된 아이는 2등을 한 친구와 한 팀이 되어 교육지원청 대회에 나갔고, 거기서도 상을 받아 시 대회까지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 대회는 팀워크가 중요한 대회였고, 손발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던 두 아이는 결국 참가상에 가까운 장려상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결과를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제가 생각한 건 A 방법이었는데, 친구가 영재교육원에서 B 방법을 배웠다면서 꼭 그걸로 해야 한다고 했어요. 제가 A 방법으로 하면 시간이 단축될 거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듣질 않더라고요. 결국 B 방법으로 하다가 실험을 끝까지 못하고 제출한 게 너무 아쉬워요."


아마, 제 아이가 말한 A 방법은 모범답안이 아니었을 겁니다. 친구 입장에서는 영재교육원에서 배운 B 방법을 모르는 제 아이가 답답했을 테고, 아이는 자기 생각을 끝까지 관철하지 못한 것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나 싶어 속상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대회 경험 부족과 서로의 입장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한 시간 안에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대회였으니, 어느 한쪽 방식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다만, 영재교육원에서조차 "이 실험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고정된 틀을 심어주는 건가 싶어 씁쓸함이 남았습니다.


학교 대표로 나간 대회의 최종 결과는 아쉬웠지만, 아이는 이 대회를 통해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습니다.

첫째, 학교에서 '과학 잘하는 아이'로 공식 등극했습니다. 말로만 아는 척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과학 실력을 갖춘 아이라는 걸 친구들이 인정해 준 모양이었습니다.

둘째, '과학'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을 얻었습니다. 대회 준비와 참여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실험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 것 같았습니다. 이전까지 '재미있는 과목'에 머물렀던 과학이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파고들고 싶은 분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인 스스로 '나는 영재야'를 증명했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영재교육원을 다니는 친구들을 이겼으니, 자신도 같은 레벨, 아니 그 이상이라고 여기는 눈치였습니다. 근자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쳤습니다.


저는 아이의 '근자감'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습니다. 사실, 잘난 척(?)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반면, 아이 아빠는 아이의 '근자감'을 늘 경계했습니다.

엄마 아빠의 다른 성향은 아이가 자신감을 지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균형감을 익히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초등 고학년 '과학 과목' 역시, 별도의 점검(12화 참조)이 필요 없었습니다.




[스물여섯 번째 고슴도치 시선]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란 단어가 저희 집에 처음 등장한 건 '영재원' 에피소드 때였습니다. 제가 아이의 '자칭 과학 영재(?) 소년' 발언을 전하자, 아이 아빠는 껄껄 웃으며 "근자감이 하늘을 찌르는구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이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이 '근자감'이 결코 근거 없는 게 아님을 차근차근 증명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아이 아빠도 인정합니다. "근자감이 아니었구먼."이라고 말입니다.




[다음 이야기] 영어, 그 미스터리한 실력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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