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TV에서 익숙한 성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역시나 E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극한직업'의 재방송이 한창이었다. 다른 집 남자들은 주로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을 즐겨본다는데, 우리 집 남자는 유독 '극한직업'을 좋아한다. 이번 편은 제목부터 강렬했다. '바다의 제왕, 킹크랩과 랍스터 vs 붉은 대게'.
"지금이 딱 제철인데... 아버지 킹크랩 드시려나?"
울 신랑이 말하는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 그러니까 친정아버지다. 공식적으로는 '장인어른'이 맞지만, 우리는 평소 '아버지' 혹은 'OOO 씨'라 부른다. 'OOO 씨'라는 호칭은 남들 보기엔 다소 버릇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은 애칭이다.
신랑의 제안으로 친정에 전화를 드리자, 아버지는 "킹크랩은 먹어본 적이 없다"라고 하셨다. 그 한마디에, 우리는 갑자기 킹크랩을 사러 가게 되었다.
분명, 나처럼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집돌이 재질인데, 이럴 때 보면 추진력이 대단하다. 아니면... 아버지가 보고 싶었던 걸까?
처음 가본 대형 수산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싱싱한 회감과 다양한 해산물이 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신랑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가게들이 워낙 많다 보니, 상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호객행위가 이어졌고, 내향인인 나는 그런 상황이 몹시 불편했기 때문이다.
울 신랑에게 선택된 킹크랩은 제법 실했다. 하지만 4명이 먹기엔 좀 부족한 것 같다며 랍스터와 모둠회까지 신중하게 골랐다.
주말이라 오가는 길이 막힐 수도 있을 것 같고, 가게에서 킹크랩과 랍스터가 쪄지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넉넉하게 시간 약속을 잡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친정에 도착했다. 친정아버지는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다며, 이른 저녁도 반기셨다.
잠시 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킹크랩과 랍스터가 식탁 위에 올랐다. 그 냄새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울 신랑은 비닐장갑을 끼고 본격적으로 해체 작업에 들어갔고, 우리는 어미새의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젓가락을 꼭 쥔 채 눈을 반짝였다.
"우와, 살 봐. 엄청 토실하네."
"씹는 맛이 있으실 겁니다."
"이야, 이게 킹크랩 맛이구나?!"
친정아버지는 연신 감탄하시며 킹크랩 맛을 보셨고, 울 신랑은 그런 아버지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손은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킹크랩과 랍스터, 그리고 모둠회는 정말 훌륭한 저녁식사였다. 물론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새로운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했다. 무엇보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울 신랑이 고마웠다.
"맛은 어떠셨어요?"
후식으로 친정엄마가 깎아주시는 과일을 먹으며 여쭈었다.
"늬들이 게맛을 알어? 이렇게 물으면, 이젠 안다고 대답할 것 같다."
아버지가 갑자기 오래된 CF를 소환하셔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 와중에 나는 입이 근질근질해 결국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아부지, 게 아니고 킹크랩이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