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28, 29개월 육아 & 놀이(교육)
생후 28개월 차, 갑자기 문화센터를 가고 싶지 않다고 떼를 썼다.
"왜 가고 싶지 않을까?"
"할머니 말고, 엄마와 같이 갈래."
그 당시 나는 3차에 걸친 박사학위논문 발표 일정이 잡혀있던 시기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었지만, 아이가 문화센터에 적응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싶어 시간을 쪼개 아이와 함께 문화센터 수업을 들으러 갔다. 하지만, 내가 같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문화센터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문화센터 수업이 재미없어? 어떤 부분이 재미없을까?"
문화센터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이의 마음이 알고 싶어, 이것저것 물었더니, 한참을 망설이다, "선생님 춤이 너무 시시해."라고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우리 OO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시시할 수 있지."
그래서, 그다음 주 문화센터에 가기 전,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춤을 아무렇게나 출 수 있게 허락을 받았더니 그제야 신나게 수업에 참여했다. 그 후, 문화센터에서 만난 여자사람 친구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면서 더 이상 문화센터에 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센터를 가는 날엔 꼭, "오늘은 엄마와 갈래."라고 말했고, 너무 바빠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는 나는 마음이 아팠다.
29개월까지는 대부분의 날들을 외할머니와 함께 문화센터 수업을 다녔지만, 엄마와 함께 문화센터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니, 바쁜 일정 속에서도 한번 정도 더 시간을 내 아이와 함께 문화센터를 다녀왔다. 그날, 아이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친정 엄마 말씀에 따르면, 문화센터 수업은 이제 거의 적응을 해서 춤을 제외하고는 선생님 말씀을 잘 따랐고, 나서거나 아는 척을 한다거나 까불거나 하는 일 없이 모범적으로 행동한다고 하셨다. 수줍음이 많은 건지, 아님 아직 환경이 낯선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수업에 잘 따라와 주니 선생님께서도 많이 예뻐하신다고 하셨다.
말은 계속 늘어, "~해도 될까요?" 같은 부탁하는 말도 할 줄 알게 되었고, 가끔 부정확한 발음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왜 내 말을 못 알아들어~." 하면서 속상해 하긴 했지만, 차츰 그 횟수도 줄어들었다.
식욕이 좀 느는지 밥을 엄청 잘 먹었고, 아빠가 하는 행동을 뭐든 따라 하려고 했다.
집안일도 참 열심히 거들었는데, 물론 아이한테는 집안일이 아닌 놀이였을 테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다 보니, 별의별 활동들이 다 가능했던 것 같다.
생후 29개월이 끝날 무렵, 한 달 반 가까이 이어졌던 박사학위 논문 심사가 모두 끝이 났다. 거의 막판에는 정말 아이한테 1도 신경을 못썼더니, 아이에게 애정결핍 증상이 나타났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고, 주말에도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있다 들어갔더니, 퇴근하자마자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져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놀자, 놀자, 엄마, 놀자." 하며 떼를 썼다. 많이 바쁜 나날들이었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퇴근 후에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지만,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애정 결핍이 생기면 아이들이 아프다더니, 결국 논문 마지막 심사 무렵엔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나에게도 중요한 순간이라, 아이를 친정부모님께 맡겨두고 무거운 마음으로 마지막 심사를 마쳤다.
정말, 이 시기는 아이뿐만 아니라, 나 또한 몸과 마음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한동안 외할아버지께서 사주신 빨간색 자동차를 찬밥취급 하더니 다시 사랑에 빠졌고, 공을 주고받던 놀이에서 업그레이드되어서 농구와 축구를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
층간소음 어쩔...
조심시키고, 주의시키긴 했지만, 12층에 사시는 분들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때마다 너무 죄송했다. 하지만, 다행히 아이의 성장을 이해해 주시는 좋은 분들이라 큰 트러블은 생기지 않았다.
최애 TV 프로그램이 뽀로로와 토마스 기차로 바뀐 이후, 하루종일 뽀로로와 토마스 기차에 대한 이야길 했고, 상상놀이를 넘어 역할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의사 선생님과 문화센터 선생님 흉내를 잘 냈는데, 아이가 역할놀이를 할 때면 온 식구가 동참해야 해서 무지 바빴었다.
"우리 친구들 모두모두 모이세요. OOO(내 이름 or/and 이모 이름 or/and 외할머니 이름 or/and 외할아버지 이름 or/and 아빠 이름). 선생님이 부르면 예예 선생님 해야지. OOO."
"예예 선생님."
"자, 신나게 하자."
"예예 선생님."
문화센터 놀이를 할 때면, 외할아버지도 어김없이 이름으로 불렸고, 호루라기를 불 줄 알게 되면서, 문화센터 선생님 역할은 완전 찰떡이었다.
의사놀이를 할 때도 모두가 환자가 되어 아이의 병원(?)을 방문해야 했다.
나는 항상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는 중증환자가 되어 아이가 모든 곳을 다 치료할 때까지 꿀 같은 휴식을 만끽했다. 주사도 맞고, 수술도 받고, 약도 먹고. 배가 아팠다가, 머리가 아팠다가, 다리가 아팠다가... 무한체력인 아이의 놀이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내 체력을 최대한 아끼는 꼼수(?)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중증환자가 되면 여러 곳을 치료받아야 해서 최소 10분 정도는 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아이가 문화센터 선생님이 되는 것보다는 의사 선생님이 되는 역할 놀이가 좀 더 편했던 것 같다.
제대로 된 음악놀이세트를 이용한 작은 음악대(20개월), 아빠와 결성한 밴드(26개월)를 거쳐, 이젠 기타리스트로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아빠와의 밴드 공연은 두 돌 생일에 받은 전자 키보드와 막내 이모가 사준 기타로 제법 구색을 갖췄지만, 밴드 멤버인 아빠가 너무 바빠, 이 시기엔 솔로 기타리스트 공연을 주로 했었다. 음치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노래를 잘해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면 제법 들을만했다.
하루는, 친정부모님께서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큰 모임에 아이만 데리고 갔었는데, 그날도 기타를 챙겨가서는 그곳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3곡이나 불러 용돈을 잔뜩 받아왔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더 이상 솔로 기타리스트의 대규모 공연은 개최되지 않았다. 그날 그곳에서 무슨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상황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모습을 더 이상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주말에도 엄마가 함께하지 못하는 날들이 생기자, 아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이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키즈카페에도 자주 갔던 시기였다.
생후 23개월 무렵부터 생긴 시간 개념이 좀 더 확장돼서, 시계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고장 난 시계를 가져다가 시침과 분침에 대해 설명해 줬더니, 정각과 30분 단위 정도는 정확하게 이해했고, 밤과 낮에 대한 개념도 생긴 것 같았다.
알고 있는 단어가 점점 늘어났고, 한글 스티커 놀이도 즐겨하고 있어서 한글 구성에 대해서도 알려줘 봤는데, 역시 빠르게 이해하고 글자를 만들 줄 알게 되었다.
"우리 "가"라는 글자를 한번 만들어 볼까? "가"라는 글자는 "ㄱ"과 "ㅏ"로 만들 수 있어."
"그럼 "나"는 "ㄴ"과 "ㅏ"로 만들어진 거야?"
숫자도 100까지 셀 수 있게 되었고, 어느새 덧셈과 뺄셈의 의미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내가 없는 낮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외할머니와 메추리알을 까면서 1부터 100까지 숫자를 셌고, 방울토마토 10개를 간식으로 먹으면서 하나씩 입으로 사라지는 뺄셈을 이해했다.
그냥 일상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것이었는데, 그래도 아이의 학습능력에 깜짝깜짝 놀라는 날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건강을 회복한 후, 보육교사 공부를 하고 있던 동생의 육아 도우미 역할이 내 육아와 시너지를 일으켜 아이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