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만나기 D-50, 태교 하는 아빠
나는 때때로 잠이 들지 못한다.
더워서, 피곤해서, 혹은 피곤하지 않아서, 어떤 날은 그냥 잠이 들지 못한다.
등만 침대에 대면 자에 드는 등잠이과 우리 아내는 침대의 삼분의 이를 쓰는 것도 모자라서 내 배 위에 팔을 올리고 잘도 주무신다. 손을 치울까 싶어 아내의 손목을 그러쥐었는데 아내의 맥박이 느껴진다. 잠을 자는 이 시간에도, 맥박에서 느껴지는 그 미미한 진동이 내 아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두근, 두근' 맥박의 느낌이 내 손을 통해 귀까지 전달되는 느낌이다. 문득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우리 아이도 이렇게 살아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손을 배 위에 가져가 보아야 알 수 있는 그 작은 진동으로, 그 여린 아이가 살아 있음을 알려준다.
아이가 생긴 지도 벌써 230일 가까이 되어 가는데, 이 아이를 받아들이고 내가 사랑해야 할 딸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그 당연한 것이 왜 이렇게 더딘지 모르겠다. 문득 아이가 생겼다는 말에 환성을 지르며 그 순간 나의 아이로 받아들이는 지인들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지인들에게 물어보면 생각보다 남자들의 경우 이런 경우가 많지는 않았다. 약 절반?)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어렵고 더딘 사람이구나.'
그래서 아이를 갖는 것에 그렇게 소극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5년이 지나서야 아이를 가질 결심을 하게 될 만큼. 아이라는 존재는 그만큼 나에게 멀게 느껴졌었고, 인생에 한 번도 오지 않을 분기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병원에서 너무 많이 사진을 보여주고(8개월 된 이 시점까지 아내가 산부인과에 가는 모든 일정에 같이 참여했다. 으쓱), 아내의 배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는 시점도 되었다. 그런데도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아는 것과 그게 마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래서 아빠들에게 태교란 게 필요한 것 같다. 요즘 나는 아내를 소파 앉히거나 눕히고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의성어와 다양한 목소리를 내어 인물을 표현하며 태교 동화를 읽어준다. 아내는 그런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정말 깔깔 거리며 웃는다. 이런 나의 가상한 노력이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전달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태교를 할수록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이가 내 마음속에서 점점 더 선명하게 자리 잡는다. 태교는 아이뿐만 아니라 한 남자를 아빠로 성장시킨다. 아이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내가 아빠라는 사실을 자각시킨다.
아빠는 엄마와 다르다. 엄마는 몸의 변화를 통해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느낀다. 아빠는 그럴 수 없다. 임신 8개월이 넘어서 아내의 배가 이제는 많이 불러 거동이 불편해지는 시기를 보내지만, 아직까지도 나의 눈에는 아이보다는 아내가 눈에 더 들어온다.(내가 상상력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를 만나기 D-50. 더 많이 아이를 위해 기도 하고, 아이를 위해 책을 읽어주고,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아내의 배 앞에서 태명을 말하며 사랑한다고 말한다.(사랑한다고도 많이 하지만 엄마 욕을 제일 많이 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가 아니라 아빠 편을 들어주도록)
그럼 아직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어색한 표정이라도 태어났을 때 나를 아빠로 알아봐 주고 방긋 웃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