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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Nov 08. 2019

커피, 수다와 블렌딩하다



“뭐 마실래?” 

에스프레소를 떠올리며 메뉴판을 올려다본다. 커피의 진한 향을 맡으며 야금야금 맛보는 것은 무척 매력적이니까. 제대로 한잔을 마시겠다면서 시선은 미끄러진다. 아포카토 커피는 어떨까. 에스프레소를 뿌려서 떠먹는 아이스크림 맛은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들다가 강렬하게 마무리되는 것도 좋겠지. 아니, 친구와 달달하게 수다를 버무리면 오늘 하루에 생기를 듬뿍 끼얹어줄지도 모르니 쌉쓸한 맛의 에스프레소를 주문한다. 얼마 전에 마셨던 에스프레소는 에티오피아커피와 콜롬비아커피를 4대6으로 섞었는데 설탕 없이 그대로 마셔도 지나치지 않았으니까. 친구는 아메리카노다.

“얘, 한 잔의 커피와 주고받는 수다의 비율은 얼마가 될까?”

친구는 점심시간에 동료직원들과 무리를 지어 가는 직장인들을 떠올렸나보다. 

“손에는 컵을 들고 가든지 이미 카페에서 차를 마신 얼굴 표정들이 부드러웠거든. 식후에 가벼운 수다 때문일 거야. 길에서 커피나 음료수를 마셔도 흉잡히기는커녕 식후에 코스가 되어버렸잖아. 수다가 길어져 커피 잔을 들고 흔들리는 버스에 올라와 문제가 되었던지 ‘탑승시 음식물을 가져오지 말’라는 멘트가 나오는 거 너도 들었지? 사무적으로 잠깐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우리처럼 여유를 가지고 분위기가 좋다거나 맛이 좋아서 취향에 따라 드나드는 장소들이 달라. 다방 커피, 모닝커피, 자판기 커피를 말하다가 오늘은 어디서 무얼 마실까 고민하며 메뉴판 앞에서 머뭇거리는 편이야. 사실은 커피의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든. 한 잔의 커피를 시켜놓은 것도 그저 수다가 필요했던 거지.”

커피가 나왔다. 작은 잔을 드니 진한 커피향이 온몸으로 번진다. 친구를 건너다보며 불쑥 또 한 마디 던진다.

“너는 집으로 사람을 초대하는 일이 번거롭지 않니?”

“나도 그래서 밖에서 주로 만나. 거실이 밖으로 나와 한창 성업 중인 것 같지 않아? 여기도 커피점 저기도 커피점, 가는 곳마다 이야기꽃들이 만화방창이지.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수다스러워졌는지. 침묵이 금이라던 말은 구석으로 밀려나고 속풀이 수다들이 맥주병 뚜껑 따놓은 듯이 흘러넘치는 것 같아. 어쩌다 밀린 숙제를 마쳐야할 때 노트북을 들고 커피점에 가보는데 옆 사람의 수다가 소음수준이라도 내 귀가 철저하게 방어벽을 치기에 스스로 놀라게 돼.”

“요렇게 계란만한 잔에 담긴 커피 값이 밥값과 맞먹어도 코스가 완성되려면 커피로 입가심을 하는 게 좋지. 입안이 텁텁해서, 따로 할 이야기가 남아서, 살롱처럼 분위기가 좋아서, 갓 볶은 원두라서 찾는 이유들을 말하지만 바쁠 때는 편의점에 들러 테이크아웃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커피를 마시는 거지. 때때로 커피점에서 한나절 진을 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까 그때 찻값은 자릿값인 셈이지. 유럽에 여행을 가니까 바깥에 내놓은 탁자에 사람들이 마주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거기도 수다가 더 많은가봐.”

“난 커피 향이 좋아 아무 때나 마셨다가는 치명적이야. 넌 괜찮아?”

“묽게 탄 아메리카노지만 밤새 잠이 안 와서 뒤척거리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낮에 마신 커피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 불면의 밤이 얼마나 괴로운지 너도 아는구나. 아예 작정하고 책상으로 가 앉은 날은 꼴딱 밤을 새우기 십상이야. 후유증은 다음날에도 이어져서 지하철과 버스 안이나 강의를 듣는 중에도 꾸벅꾸벅해서 민망할 때가 많아. 커피향의 유혹 때문에 되풀이 되는 악순환이야. 커피에 예민하거나 숱한 이름들을 알지 못한 채 마시는 사람도 많은지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는 게 아프리카노’라고 말했다는 우스개 너도 들었지?”

“그럼, 마약 같은 중독성으로 커피가 세계적인 음료가 되어버렸는데, 마냥 좋아할 수만 없는 굴곡이 있었어. 오래전 에티오피아 산악 지대에 사는 원주민들 사이에 약용으로 쓰이다가 유럽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탐욕은 어마무시한 부를 낳았다고 해. 부는 권력을 낳고 국력에 영향을 주었던 역사에는 빛과 그늘이 깊은 건 당연하지. 영국에 커피하우스가 유행하고 유럽과 미대륙으로 퍼져나가 이제는 우리도 커피 소비량이 만만치가 않아. 커피 애호가들이 늘어나고 커피와 함께 묻어온 알 듯 모르듯 한 로스팅, 블렌딩 커피산지를 따온 온갖 이름들은 일상어가 되어서 굳이 모른다고 묻지 않고 감각으로 묻어가는 거야. 취향에 따라 생활 속 깊숙이 들어왔으니 대화하기 좋은 장소로 커피점보다 더 나은 데가 있을까 싶어.”

어느새 바닥이 보이는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친구에게 동의를 구한다.

“TV를 틀어봐. 패널들이 질세라 열을 올리는 거. 언어를 너무 과소비하는 거 아냐?”

“프로그램들이 수다와 버무려져야 재미가 느끼다보니 시청률 올리느라 말 말 말이 넘치고 있기는 해. 정치토크, 속풀이토크 같은 말잔치는 수다의 춘추전국 시대랄까. 근엄하던 시절은 침몰하고 모두가 밝고 가볍고 유쾌해진 것인지, 이제 억눌린 감정들을 식후에 푸는 수다는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은 것 같아. 말은 말을 낳고 소통이 오히려 불통이 되는 건 아닌지. 가만히 있으면 본전이던 때가 아니라서 집안에서도 언어의 주파수는 기복이 심해. 혀의 근육들이 단단해졌나봐. 수다라는 것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라도 가볍게 말하는 것이니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든지 적절하게 버무리면 좋으련만.”

여운처럼 남은 커피의 뒷맛을 음미하다가 거든다.

“커피라고 쓰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 시거나 달고 중후하거나 향기롭기도 해서 미묘한 차이로 구분하지. 언제나 원하는 사람만 만나며 살 수 없듯이 고급 아라비카 커피만을 고집하지 않으려고 해. 원두의 원산지, 볶는 정도, 가공방법이나 혼합 비율에 따라 다르듯 다양한 사람들 끼리 커피 블렌딩을 하듯이 적절하게 어울리면 그날의 대화는 만족스럽지 않을까. 서로 다른 성질의 원두가 섞이듯 사람들에게서 저마다의 풍미를 느낄 거야.”

커피와 수다가 넘치는 시대에 우리의 수다가 적절하게 블렌딩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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