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한국에서 새해 선물이 도착했다. 피부가 뒤집어진 나를 위해 로션과 마스크팩, 좋아하는 라면이 가득, 그리고 고춧가루 등이 있었다. 거기에 딸린 편지 두 통, 친동생에게 난생처음 받아보는 편지는 낯설고 묘했다. 사실 글씨체를 본 적이 없어 누가 대신 써준 건 아닌가 의심부터 했다. 다른 편지는 친동생의 연인이자 잘 알고 지내던 동생으로부터 왔다. 잘 만난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여기에서는 라면도, 피부에 맞는 로션도 구하기가 힘들다. 부족한 건 밑 빠진 독처럼 끝도 없어 가끔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렇게 적당히 내려놓음을 실천하다 돌아서면 욕심부리는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처음 탄자니아에 도착했을 때 품었던 여러 목표 중 하나는 이방인이 아니라 그저 이웃 주민으로 여기에 스며드는 것이었다. 절반이 지나가는 즈음, 나는 아직 얼마만큼 이방인이고 얼마만큼 이웃 주민이 되었나 생각이 든다.
길에서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한다. 이 곳의 인사 문화는 참으로 다양하고 익숙하다 싶기 무섭게 새로운 표현이 나온다. 내게 단계별로 현지어를 가르쳐주려는 당신들의 노고일까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지금 이대로 한국에 가면 백번 양보해도 '도를 아시나요' 혹은 '관상이 좋은데 시간 되시나요'처럼 보일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눈을 마주치면 인사하고 악수하며 안부를 묻는다. 출근 시간이 많게는 배로 걸리지만 괜찮다.
동양인을 치나(China)라고 부른다. 중국이 인구가 워낙 많기도 할뿐더러 일찍부터 중국인이 들어온 대륙이라 동양인은 치나라는 인식이 강하다. 동네를 벗어나면 나는 중국인이 된다. 썩 내키지 않지만 일일이 대응하기도 피곤해 적당히 넘어가곤 한다. 어디까지나 동네 밖 일이니 괜찮다.
매일 같은 길을 출퇴근하고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동네에서 나는 한국인이며, 이웃 주민이다. 자주 가는 슈퍼의 아주머니네 가족이 몇 명이고 첫째가 한국 드라마에 푹 빠진 사실도 알고 있다. 출근을 하면 master가 된다. 이전에 수업을 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학생들에게 나는 중국인도 일본인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뒤로 자기들도 그들을 싫어한다고 했다.(지나온 일들에 분노하지,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정정했다.) 이유를 물으니 내가 싫어해서 자기들도싫단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감동적이다.
몽골에서는 한국을 설렁거스라 부른다. 무지개라는 뜻으로 무지개의 나라를 의미한다. 무엇보다 그 말이 정말 좋았다. 그곳에서 떠나던 날 영하 30도의 추위와 기차역, 늦은 밤이었는데도 마중 나와 배웅해준 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수도꼭지 튼 것 마냥 펑펑 울어버린 그 날은 아마 평생을 살아도 잊지 못할 장면일 것이다.
이방인이라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 사람을 사귀는 게 어려워 헤어지는 일 역시 쉽지가 않다. 벌써부터 상상만 해도 겁부터 난다. 무슨 말을 해야 하며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며, 지금 생각해봤자 막상 닥치면 머리가 하얘지고 감정을 못 숨겨 울음보 터져버릴 모습이 뻔하다. 그 날이 조금이라도 덜 창피하도록 내일 또 인사하고 악수하기 위해 얼른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