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핑계 : 기질
요즘 한국인들은 죄다 인류학자나 심리학자인 듯 싶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 서로 마이어스 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를 묻는다니? MBTI 말이다. 그냥 유형만 묻는 것도 아니다. 그 유형에 따라 적절한 대응법을 준비하고 행동의 인과를 진단한다. 하여간 대단한 교육열의 민족이라니까.
항상 문제는 과몰입이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MBTI를 일상 곳곳에 대입시키는 기조가 있다. 공감력이 부족한 상대에게 ‘너 T(이성적)야?’라고 묻는다던가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을 보면 ‘E(외향적)들은 기 빨려‘라고 말하는 식으로 말이다. 차라리 이런 게 근거도 없이 까내리는 것보단 덜 무례하지 않나 싶다가도, 결국 사람을 유형화 해서 갈라치기 하는 데 유난인 한국인 특성 아니겠는가. 이 이전엔 혈액형이, 그보다 이전엔 심리테스트나 별자리, 사주 같은 게 그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게 MBTI로 유행이 옮겨간 것 뿐이지.
그럼에도 내가 여기서 굳이 MBTI를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네번째 자리의 지표에 있다. J와 P. 간단히 설명하자면 J는 ‘계획형‘이고 P는 그 반대편의 ’즉흥형‘인데, 뭐 둘 다 좋은 말로 표현은 해두었지만 뉘앙스가 딱 느껴지지 않나? 부지런하게 계획을 세우는 쪽이 J니까, 자연스레 P의 몫은 게으름이 된다. 다른 지표인 E(외향적)와 I(내향적), N(직관형)과 S(감각형), F(감성적)와 T(이성적)는 그래도 그나마 상대편의 개성을 인정하는 편인데 유독 P에 있어서는 대접이 박하다. 검사에서 P가 나올까봐 무슨 저주라도 내리는 것 마냥 두려워하고, 블로그나 유튜브에 ‘J 되는 법’, ‘P 고치는 법’ 같은 게 널렸다.
나는 P다. 그것도 ENFP다. 그러니까, 나가서 노는 걸 좋아하고(E) 망상을 즐기며(N) 감정에 휩쓸리고(F) 즉흥적인(P) 유형이다. 내가 실제로 그런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MBTI 검사에선 그렇다. 그냥 어쩌다 한 번 나오는 게 아니라 15년 전 고등학교 진로 교과시간에 처음 해본 이후로 여태껏 한 번도 예외없이 ENFP만 나왔다. 그때 당시엔 무슨 '스파크형'이라면서 '연예인이나 예술가가 어울리네요!' 같은 썩 듣기 좋은 말이 적혀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사람들이 그냥 ’대가리 꽃발‘이라고 부른다. ENFP는 대책 없이 오늘만 사는 인간들이라는 게 요즘 중론이다. 어쩐지 게으름에 대한 만화를 그린다고 했을 때 내 MBTI를 말하면 다들 쉽게 끄덕거리더라.
그러고 보니 회사 다닐 적 인사팀 선배도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다. 회사는 ENFP의 무덤이라고. 회사원 ENFP의 운명은 둘 중 하나랬다. MBTI가 바뀌거나 퇴사하거나. 자유분방한 성향 때문에 조직생활이 힘들거라고 말이다. 처음엔 그런 게 어딨냐고 속으로 반발도 해봤지만, 어느 즈음엔 나도 '이렇게 회사가 가기 싫은 이유는 내가 ENFP이기 때문이겠지‘ 하고 되뇌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퇴사를 하고 말았으니, 나는 그의 ‘ENFP 운명론’에 좋은 표본을 추가한 셈이 됐다.
아마 사람들은 운명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말하자면 해리포터의 ‘기숙사 배정 모자’처럼 알아서 정해주는 거지. 내가 그리핀도르가 될 운명인지, 슬리데린이 될 운명인지. 객관성에 기대서 내 모습을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MBTI는 마법 같은 게 아니다. 그냥 ‘계획 짜는 걸 선호하나요?’라는 질문에 ‘아주 그렇지 않다’를 선택해서 즉흥형 P가 나오는 식이다. 그래서 언제 어떤 마음으로 검사를 받냐에 따라 다른 결과값이 나오기도 한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 이런 검사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결정할 수 없다는 걸. 환경과 상황의 영향을 받는 MBTI 결과처럼, 정체성이란 내 기질에 여러 복합적인 이유들이 뒤섞여서 산출된다.
요컨대 ENFP의 가장 큰 특징 중 ‘하기 싫은 일에 대한 인내심이 적다‘가 있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의욕적인 환경만 마련되어도 에너지를 십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부류들이 더 나은 운명을 가지는 방법은, P를 J로 바꾸는 일 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찾고 지속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쪽에 더 가깝다. 그것의 목표가 생산성이든, 행복감이든.
게다가 말하기 좀 쑥스럽지만 나는 꽤나 탁월한 직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냥 언제부턴가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눈에 뭔가를 알아채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그것에 대한 자신감이 부지런함 대신 순발력이나 창의력을 더 계발하도록 만든 것 아닐까. 말하자면… 게으른 천재로서의 숙명을 말이다. (농담이다) 이 또한 ENFP의 구별되는 특징 중 하나다. 나는 이 특별한 감각을 지켜내기 위해 15년 넘게 MBTI 검사지에다가 같은 대답을 입력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게으른 건 참을 수 있어도 평범한 건 딱 질색인 편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 직감이라는 게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발동 조건이 좀 까다롭다. 그 조건이 뭐냐면... 사실 나도 아직 모른다. 유튜브나 나무위키 같은 데서 레퍼런스를 얻기도 하고, 좀 누워있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랜덤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 감이라는 게 올 때까지 좀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한다. 누군가 보면 그게 그냥 게으른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크흠.
아무튼 MBTI 같은 건 딱 질색이야... 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눈치 챘겠지만 나 역시 유형론에 환장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가령 내가 당신과 만난다면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기 전부터 MBTI를 추측해보고 있을 것이며,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어떤 지표가 가장 다른지에서 이유를 찾고 있을 거다. 그 뿐인가. 나는 당신이 혈액형 O형이라는 것만으로 호감도가 올라가고 사주 오행 중 물이 많다면 마음의 문까지도 쉽게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내가 이토록 유난하게도 당신의 MBTI를 궁금해 하는 목적은 ‘지레짐작’ 같은 게 아니다. 그 자리를 ’관심‘으로 치환해보면 또 좀 살가워지는 것도 같다. 공감 못하겠다고? 혹시 T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