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핑계 : 자기방어
군대 이야기 해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글감으로 이만한 게 있을까? 이십대 초에 처음 맞닥뜨리는 사회 생활의 다이나믹함 말이다. 또 좀 별난 사회생활인가. 그 폐쇄된 공간에, 그 불합리한 관습에, 각종 가혹행위(2012년도)까지 잔존하던 그 시절은, 꼭 트라우마가 아니더라도 인생의 어떤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이해해달라. 아마 남자들이 자꾸 그때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것은 위업에 대한 자랑보다는 이쪽에 대한 하소연이 더 클 테다. 하지만 지난하고 자질구레한 일들은 제쳐두고, 내가 꺼내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이 남긴 어떤 한가지 버릇에 대한 것이다.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꾼다던 재입대 꿈도 뜸해질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주 입에 오르는 군대 시절 말버릇이 있다. 다들 하나쯤은 있을 거다. 어디서부터 내려온지도 모르는 자기네 부대 은어. 우리 부대의 경우엔 이게 그랬다.
차진 어감을 가진 한 음절. 이 정체불명의 글자는 영어도 중국어도 아니다. 이거, ’핑계 대냐?‘라는 뜻이다. 엄격한 조직 집단인 군대에서는 사건사고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건 당사자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후임이 실수 직후에 구구절절 상황 설명만 늘어놓을 때 선임이 말을 슥 자르고 ‘핑?’ 한 마디를 대면,
여긴 군대야, 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데 탓을 돌리는 거니? 실수를 시정하지 않고 핑계를 대는 너에게 실망해도 되겠니?
라는 의도를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군대의 효율성이 이토록 놀랍다. 아무래도 실제 용도는 효율보다는 갈구기에 있었겠지만.
핑은 제대 후에도 종종 사용되곤 했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지금 이거, 핑?’ 그러면 안되는 이유들은 한꺼번에 일축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또 그런 내 모습이 좀 어른스러운 것도 같았다. 사람들도 좋아하던데? ‘역시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니까’라면서. 게으른 마음이 들거나 변명이 불쑥불쑥 생겨나려고 할 때마다 회초리처럼 핑을 꺼내들었다. 그럼 따끔하게 정신이 들었다. 핑은 효율이 좋았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핑을 활용해 보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핑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말했던가, 군생활은 별난 경험이었다고. 그 곳에서의 논리는 사회와 조금 다르게 적용된다. ‘까라면 까’라는 그곳의 오랜 격언처럼, 군대는 임무의 수행을 위해 모든 일이 질서와 효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게 어디 효율로만 성과가 귀결되던가. 대부분 인과관계가 복잡다단하게 엮여 있다. 여기서 ‘핑’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바로 인과의 추적이 안된다는 것. 이유들을 전부 잘라먹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잘못했다는 기억만 남고 내가 왜 그런 잘못을 했는지는 알 수 없게 된다.
‘일만 잘하면 됐지’. 한국 사회에서는 핑계를 극도로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특히 꺼리는 문화 때문에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공동체에서 그런 마음이 얼마나 기특한 배려이던가. 문제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점. 자신을 봐주지 않는 인간이 된다. 게을러진다거나 일이 하기 싫어질 때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생각해보기보다, ‘그냥 해!’를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 일이야 어떻게든 이어갈 수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생긴 오해는 골이 깊어지면 마음의 병이 된다. 대체 내 마음이 왜 이러는지 괴로워도 그 이유를 추적할 수가 없다.
시간을 들여서 인과를 파악할 필요가 있는 일도 있다.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효율이 중요한 게 아니다. 찬찬히 살펴봐줄 필요가 있다.
아마 아직까지도 ‘핑’이 내 입에 계속 맴돌았던 까닭은, 돌이켜 보건대 그 당시 내가 무척이나 억울했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군대의 불문율을 깨고서라도 구태여 설명해야 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대충’ 했거나 ‘반항’했거나 ‘멍청’했던 게 아니라고. 자기방어를 위한 책임전가가 아니라 분명히 존재했던 뚜렷한 인과가 말이다.
핑계는 중요한 단서다. 나도 모르는 나의 내면을 알아내기 위한 단서. 일하기 싫은 마음에 대해 무작정 호통을 치는 대신 가만히 그 핑계를 추적하다 보면, 어떤 알고리즘에 따라 내 게으름이 발현되는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내 게으름의 출처는 부도덕이 아니라 어떤 기질에서 출발했다는 사실도.
그러니 나는 핑?이라고 일축하지 않겠다. 나는 당신의 핑계가 궁금하다. 이 책을 집어들게 만든 당신의 게으름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어떨 때 게을러지는지. 이 책의 어느 지점에 우리의 공감이 만나는 구석이 있었는지. 구구절절 들어보고 싶다. 쓰다 보니 꼭 이 말이 댓글을 써 달라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는데? 바로 그거다.
스스로에게 핑계를 늘어놓을 시간이 필요하다. 단, 우리 너무 거창해지지 않기로 하자. 거창하면 구차해지기 쉬우니까. 이 댓글 구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