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핑계 : 컨디션
이번엔 웬일로 오래 가나 했다.
작년 초봄, 유튜브를 보다가 미라클모닝에 확 꽂혀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어진 거다. 안다, 나도. 안 어울리는 짓이란 거. 그런데 하도 미라클모닝으로 인생이 바뀐 사람들의 간증을 보다보니 궁금증이 치밀고, 불쑥 ‘나라고 왜 못해?’ 같은 오기가 치밀더니, 그 다음으론 알 수 없는 자신감 같은 게 치밀었다. 다들 이런 식으로 자기계발에 입교하게 되는 걸까? 아무튼 그렇게 덜컥 시작해서 미라클모닝 3주차 달성. 3주라니, 정말로 몸이 가뿐해지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차오르는 기분에 브이로그까지 찍고 말았다. 나 이러다 아침형 인간에 눈 떠버리는 거 아닌가?
아, 미라클모닝에 대해 잘 모른다면 겨우 좀 일찍 일어나는 걸로 대수롭게 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조금 설명을 하자면 일단 ‘좀 일찍’ 일어나는 게 아니다. ‘심하게 일찍’이다. 다섯시 기상이라니, 이 챌린지의 이름은 ‘미라클던(miracle dawn)’으로 정정 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기상만 해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명상, 글쓰기, 독서, 확언(‘나는 할 수 있다’ 같은 문장을 몇 분 동안 소리 내서 읽는 식이다)… 뭐 이런 여섯 가지 미션을 전부 해내는 것이 한 패키지다.
물론 못할 건 아니다. 좀 익숙해지고 나면 1시간 안쪽으로 끝난다. 그러나 가장 큰 존재감은 이거다.
아침 달리기.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운 몸을 저 어두컴컴한 길에 굴려야 한다. 하필 초봄에 마음 먹는 바람에 운이 나쁘면 자주 영하권의 꽁꽁 언 땅을 박차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모든 미션을 다 해치우고도 아무리 늦어봤자 일곱시다. 원래 열 시나 되어야 눈을 뜨는 초야행성 인간이 아침 일곱시에 이 정도의 생산력이라니, 이만하면 브이로그 찍고 호들갑 떨만 하지 않나?
내가 처음에 뭐라고 했더라. 그래, 결론적으로 이 도전은 3주만에 막을 내렸다. 업로드한 브이로그가 무색하게 갑자기 뚝 하고 멈췄다. 아, 물론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지. 여느 날처럼 제 시간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는데 그 날 따라 발목 컨디션이 꽤나 좋은 거다. 이 몸의 한계는 어디일까? 속도를 올려서 보통의 두 배 정도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무리였던가, 7km 지점 쯤에서 발목이 저릿하더니 결국 절뚝절뚝 절면서 집에 왔다. 저녁이 돼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자 병원 진료를 받았고 결과는 아뿔싸… 피로 골절에 3주 깁스행. 하… 사람들에게 내 생생한 미라클모닝 체험기를 더 보여줘야 하는데. 여기 아침형 천재가 지금 막 눈을 뜬 참이었는데. 정말 아쉽게도, 너무 너무 안타깝게도 발목이 삐는 바람에 더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엉엉. 진짜 발목만 안 다쳤어도…
아. 그럼 달리기만 빼고 계속 하지, 왜 아예 미라클모닝을 관뒀냐고? 그거야, 흥이 깨져 버렸으니깐. 흥. 달리기 없는 미라클모닝은 반쪽 짜리지 않나. 이렇게 된 거 다 나을 때까지 좀 충분히 쉬다가 다시 재개해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걸 시작으로 생각이 번졌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중얼중얼 확언 문장을 읊어대는 건 좀 모양새가 웃기고, 명상한답시고 눈 감고 손 모으고 있는 것도 바보 같았다. 지긋지긋한 알람 소리 없는 아침은 또 원래 이렇게 달콤했던가. 아이고, 다 의미 없다. 콸콸콸 쏟아지는 현자타임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기통제력은 와르르 둑이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렇게나 퍼져있는 건 정말이지 개운하고 짜릿했다. 그때 괘씸한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시 시작할 미라클모닝이라면, 발목아, 좀 천천히 나아주라.
나는 사실 발목이 삐기를 기다렸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어떤 그럴싸한 명분 말이다. 중도에 그만둬도 아무도 뭐라 못 할 명분. 그것은 불가항력적이고 천재지변에 가까울 수록 더 좋다. 회사 다닐 적 막중한 프로젝트를 앞 둘 때면 출근길 내가 탄 버스가 제발 교통사고가 났으면 하고 기도했다. 장기입원할 정도라면 더 좋겠다. 다이어트 할 때도, 연이은 단식이 너무 괴로울 때면 제발 급하게 부서 회식이 잡히길 바랐다. 회식을 그렇게도 싫어하면서 말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명분을 탓하는 척 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세상에 회식이 존재하는 한 직장인들은 살 빼기 글러먹었다면서. 물론 그 날 회식 자리에서 술은 내가 제일 맛있게 처먹었다.
꼭 이런 대형 과제가 아니더라도 모든 일은 버거워지는 때가 온다. 권태나 압박감이 그 일의 난이도를 훌쩍 상회하는 때가 말이다. 그때가 되면 인과를 샅샅이 뒤져서 명분을 찾아낸다. 크든 작든, 심지어는 발목이 삐는 불행까지도 반기는 대인배가 된다. 당장 이 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건 침착맨의 ‘오히려 좋아’나 장원영의 ‘럭키비키’ 같은 긍정이 아니다. 명백한 현실 부정이며 임시방편 수단에 불과하다. 힘들이지 않고 얻은 해방감은 명분이 사라진 후엔 더 큰 부담감이 되어 일을 더 힘들게 만든다. ‘그때 그 일 왜 관뒀더라?’ 한번 찬찬히 떠올려보면 대부분은 사소한 명분을 계기로 잠시 쉬다가 아주 하차해버렸다. 당연한 결말이지만, 발목이 완치된 후에도 미라클모닝을 재도전하는 일은 없었다.
아침에 달리기를 할 때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올랐다. 이상하다. 우사인 볼트도, 킵초게도 아닌 어떤 소설가를 먼저 떠올린다는 게. 그러나 이것은 꽤나 많은 모닝 러너들이 공감할 것이다. 달리기에 있어 하루키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는 서른 초부터 칠순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매일 아침 10km 달리기를 한다. 매일.
그걸 수십 년이 넘게 유지한 까닭은 비단 건강을 위해서 뿐만은 아니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이 실제로 장편 소설을 쓸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달리기를 통해 몸이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잘 쓰는 비결이랬다. 처음엔 그가 *러너스 하이에 중독된 게 아닐까 했다. 중독에 의지할 만도 하다. 오랜 시간 상상력에 의지해 장편을 써내는 건 초인적인 힘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러나 그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 수 있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 쓴다. 장편 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에게 중요한 것은 '페이스 유지'다.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그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리듬감을 단절하지 않는 것, 좋은 컨디션을 이어가는 요령. ‘지구력’ 말이다. 그것이 수십 년을 이어온 아침 달리기와 소설 집필의 비결이었다. 일을 끝까지 마치기 위해 중요한 것이 체력이라면, 일을 끝없이 이어가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구력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은 단거리 달리기 보다는 장거리 마라톤 아니, 끝없이 바톤을 터치하는 계주에 가까웠고.
간혹 의욕이 넘칠 때 나는 오버 페이스를 한다. ’오 이게 되네?‘ 극한까지 끌어올린 자신의 모습에 도취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 다음 날은 어제보다 지치고 만다. 밤을 새워 만든 영상에 뿌듯해하며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편집 프로그램을 열기가 두려워질 때, 장편의 글을 몰아쓰고서 며칠동안 글쓰기는 꼴도 보기 싫어질 때도 그렇다. 내 딴에는 그렇게 해야 내 최대 능력치가 나온다고 믿는 것인데, 그렇게 오버해서 열을 올린 다음엔 불씨가 아예 꺼져버리게 된다. 다음 날 바톤을 이어받을 기력도 남지 않는다. 버닝은 번아웃으로 이어진다.
번아웃이라고 하기엔 좀 창피하지만, 아무튼 나의 싫증으로 인해 아웃된 프로젝트들엔 죄다 명분들이 주석처럼 달려있다.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니 번지르르한 명분일수록 더욱 창피한 기분이다. 뭐, 그렇다고 그저 꾹 참고 견디는 게 무조건 정답은 아니었겠지만. 여태까지 이어왔다면 난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하는, 못내 아쉬운 상상으로 이어진다. 역시, 세상 모든 건 힘 빼는 게 더 어려운 법이지.
능숙한 요령으로 어느덧 ‘미라클모닝’이 ‘오디너리모닝’이 된 평행우주의 나를 떠올린다. 다시금 불쑥 ‘나라고 왜 못해?’ 하는 오기가 치미려다가, 작년에 찍어둔 브이로그를 보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거기엔 아침을 찬사하는 내 모습이 담겨있다. ‘미라클모닝을 만나고 인생이 180도 바뀌었어요!’ 응, 너는 1년 뒤 거기서 180도 더 돌아서 새벽 다섯시에 잠드는 일상이 된단다. 아아, 어떤 각오든 성공하면 호기, 실패하면 객기 아닙니까. 그래도 지우긴 아까워서 비공개로 돌린다. 이 잠재적 아침형 천재의 기록은 나 혼자만 간직하기로 한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 30분 이상 쉬지 않고 달렸을 때 밀려오는 행복감. 헤로인이나 모르핀을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의식 상태나 행복감과 비슷하다. 다리와 팔이 가벼워지고 리듬감이 생기며 피로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힘이 생긴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