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핑계 : 끈기 부족
“아무리 어려운 일도 꾸준히만 한다면 성공합니다.”
마법 같은 이 말에 사람들이 동기를 부여 받고 희망을 얻는다. 그러나 나는 절망에 빠진다.
‘그럼 꾸준히가 어려운 사람은요?’
어릴 적부터 유난히 끈기가 부족했다. 무슨 일이든 마음 먹는 데 많은 다짐이 필요했고, 어렵게 시작해도 그 지속시간이 너무 짧았다. 작심삼일이 부러울 정도였다. 막연히 생각했다. 크면 나아지겠지. 그러나 몸이 다 크고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ADHD는 커서 성인ADHD가 됐고 중도실패한 목표들만 산처럼 쌓였다.
나의 비루한 끈기력이 자기계발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문제가 되어갈 때쯤 ‘꾸준히’는 나의 노이로제가 되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들 꾸준히 하는건데? 세상은 게으른 천재와 꾸준한 범재를 대결 붙이곤 하지만, 내 입장에선 ‘꾸준’이 붙은 ‘범재’란 겸손, 아니 기만이었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열등감에 가깝다. 처음엔 인정하기 싫었지. 세상 모든 일은 첫 단추만 잘 꿰면 계속해서 순조롭게 이어갈 수 있고 그 다음은 의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증이 되는 일들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아휴, 예를 들자니 너무 자잘하다. 그냥 그런 거 있잖나. 말도 안 되는 노력 천재 주인공에게 역전패를 당하는 뻔한 클리셰. 그래, 토끼와 거북이 같은 거. 분명 처음엔 미미했던 그가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아득히 초월해버렸고, 그럼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방심했군‘ 하고 되뇌이는 식이다. 엑스트라처럼. 사실 나는 방심한 적도 없고 나름대로 간절했지만. 아, 애초에 토끼도 아니었던가.
당신이 만약 이 글이 불편한 ‘꾸준이 수월한 인간’이라면, 축하한다. 최고의 주인공 버프를 받았다. 매일 해내는 힘은 감히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겨우 오늘 해낸 걸 내일도 해내고 내일 모레도 해내는 것은 의외로 아주 고귀하고 고난스러운 일이다.
이왕 나의 열등을 변호하는 김에 한가지 더 덧붙여본다. 무려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사람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면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방어 호르몬이 분비된단다. 그런데 이게 최대 지속시간이 약 사흘 정도라 새로운 일을 작심하고 3일차가 되는 즈음엔 이미 스트레스를 방어할 수 있는 힘이 바닥이 난다는 거다. 어제 거뜬히 해냈던 일은 오늘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어있다. 이제 의지력이나 제어력 같은 걸 동원해서 일을 수행해야 하는데, 호르몬이 짱짱했던 어제나 엊그제에 비하면 같은 일이라도 난이도가 딴판이다. 그런데 그걸 간절함이나 근성으로 퉁친다고? 어림도 없지. 그건 재능의 영역이 분명하다. 스트레스를 감내하는 재능. 훈련에 따라 키울 수는 있겠지만, 그건 태어나며 결정되는 ‘기질’처럼 사람마다 다른 개인 능력의 차이임이 틀림없다.
나는 형편없는 끈기력을 대신할 재능을 찾아야 했다. 꾸준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압도적인 재능거리. 혹은 들인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도 성장 가능한 능력 무언가... 사실 뭐, 세상에 그런 건 잘 없었을 뿐더러 애초에 나는 어떤 분야에 탁월한 천재로 태어난 부류는 아니었다. 나의 소소한 재능들이 얼마 안 가 뽀록 날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별로인 나를 마주했다. 내가 별로인 사람이라는 사실은 항상 기분이 거지 같았다. 거지 같은 기분을 달래려 SNS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재능 부자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더 거지 같아지고 만다.
SNS에는 잘난 사람들만 있기 마련이지만 그들이 모두 꾸준에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다. 개중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구호의 힘을 빌린다. #오운완 #기상인증 같은 거 말이다. 혹 그런 건 보여주기식이라거나 오글거린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그런 것들이 꾸준에 재능 없는 사람들의 좋은 가림막이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파이팅을 통하여 겨우 몇 분 더 자보겠다고 알람을 연거푸 끄고 운동하기 싫어서 핑계거리를 짜낸 못난 나는 가려지고 여전히 꽤 잘난 사람으로 보여질 수 있다. 별로인 내 모습을 가리는 것만으로 꾸준을 좀 더 이어갈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런 게 일을 지속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잘나야 신나고 힘난다.
결국 ‘꾸준’이란, 별로인 나를 견디는 힘에 가깝지 않을까. 마음만큼 안 되는 하찮은 수행능력, 대중 없는 컨디션의 편차와 그럼에도 주제도 모르고 치솟는 기준의 역치, 그 모든 내 못난 것들을 감내하는 일 말이다. 니체는 말했다. 슬픔은 자신이 추하다고 생각할 때 온다고. 만사가 게을러지고 귀찮다면 마음이 추한 것과 가깝다고 말이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이 악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이건 내가 아니라고 현실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런 창피한 내가 쌓이고 쌓여 언젠가 근사한 내가 된다는 것 쯤은 나도 잘 안다.
작가가 되는 일도 글을 잘 쓰는 일보다는 혹평과 무관심을 견디는 일에 가깝겠지. 어쩌겠는가? 나는 몇 줄 곧잘 써내리다가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창피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면 금방 전부 지워버리고 며칠은 아무 것도 못 쓰는 사람인 걸. 그런 못난 글이나 쓰는 내 모습이 못 견디게 싫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