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인생 첫 게임을 기억하시는가? 나의 게임 시대는 버섯 마을에서 시작됐다.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온 세상을 여행하던 어릴 적 친구, 메이플스토리. '게임'이란 친구를 7살에 처음 만난 건 언니 오빠들 덕분이었다.
어렸을 적 엄마는 공부방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늘 공부하러 온 언니, 오빠로 가득했다. 공부방 객식구들 덕분에 나는 늘 또래보다 신문물을 빨리 알았다. 하지만 장점만 누릴 수는 없는 법. 집이 공부방이 된 탓에 우리 집은 공부방 아이들의 공용이 됐다.
내가 산 과자도 공부방 아이들과 똑같이 하나만 먹을 수 있었고, 내 방은 아이들의 쉼터가 되곤 했다. 그중에서 제일 열받았던 건, 학습 만화책 하이에나들이었다. 그리스로마신화, 내일은 실험왕, 마법천자문 이런 만화책의 다음권만 나왔다 하면 내가 사고, 읽기만 기다리던 하이에나들. 앞다퉈 만화책을 보려는 공부방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내 물건을 숨기는 법만 늘었다.
컴퓨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컴퓨터 약탈자들은 수업이 시작하기 한참 전에 와서 수업이 끝나고도 집에 갈 줄 몰랐다. 피시방처럼 게임을 진탕 즐기고 나면 그들은 새 게임을 바탕화면에 깔아놓고 떠났다. 그렇게 메이플스토리의 아이콘, 버섯 모양을 잔뜩 노려보면서
“컴퓨터 썼으면 게임은 지우고 가야지!”
하고 씩씩거릴 때. 공부방 왕언니가 다가왔다.
“왜? 재밌는데. 니도 해봐라”
마지막의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까지 언니는 날 붙잡고 아이디를 만들어줬다. 그리곤 물어봤다.
“직업은 뭐 할 건데? 칼, 활, 표창, 마법 중에 골라봐라.”
“내는 마법!”
당시에는 능력치가 랜덤으로 설정되는 탓에, 아이디를 만들고도 한참은 컴퓨터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게임을 영업하고 싶었던 건지, 게임을 삭제하지 않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든 그 언니 덕에 온종일 능력치를 설정하는 주사위를 굴려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난 나의 첫 캐릭터는 지원 마법사, 비숍! 팀으로 몬스터를 잡을 때, 지원가 혹은 힐러라는 포지션은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버프(일시 강화 효과)를 걸어 팀의 공격력을 올리고, 팀원을 치유하거나 부활시켜 아군을 지원한다. 때문에 힐러는 체력이 많지도, 공격력이 강하지도 않다. 하지만 약하기 때문에 강한 직업, 나는 힐러를 그렇게 생각했다.
팀에게 버프를 걸어줘 본 사람만이 안다. 힐러가 얼마나 통솔력 있는 직업인지. 높은 체력으로 방패막이 되는 전사, 탱커. 강한 공격력으로 칼 역할을 하는 공격수, 딜러. 하지만 체력을 회복해 주고, 공격력과 속도를 더하는 힐러가 없다면 둘은 픽 픽 쓰러지고 만다. 언제나 적을 경계하고, 공격을 피하다가, 한 판을 뒤집을 타이밍에 거침없이 팀을 이끄는 멋진 직업, 그것이 힐러다.
메이플스토리에서 비숍은 희귀했고, 모든 직업군이 파티원으로 비숍을 원했다. 그만큼 키우는 데 물약이나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지만. 어쨌거나 어린 마음에 이런 대우가 좋았고, 나름 힐러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에 시작한 게임, 오버워치에서는 이런 힐러 자부심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오버워치는 메이플 스토리와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다. 더 팀플레이 성향이 강하고, 메이플 스토리의 주력 컨텐츠는 ‘육성’이라면, 오버워치는 ‘전쟁’이었다. 총알이 빗발치고, 동료가 죽어 나가는 전장에서 서로의 거점과 화물을 지키며 6대 6으로 싸우는 게임. 그런 이유로 탱커-딜러-힐러의 각 포지션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오버워치에서는 힐러 대우가 야박하기를 넘어 ‘따까리’ 취급을 받는다. ‘게임 못하면 힐러나 해’, ‘힐딱이(힐러 따까리)는 ’ 하는 소리를 볼 때마다 힐러를 가장 애정하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호시탐탐 힐러 암살을 노리는 상대편보다 힘든 건 같은 팀을 부하 취급하는 팀원이다. 이런 처우에도 여전히 힐러가 좋은 이유는, 현실에서의 내 포지션도 힐러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누군갈 위해 나서는 탱커이자, 때로는 누굴 공격하는 딜러지만, 친구와 동료에게만은 늘 힐러가 되고 싶다. 지치고 힘들 때도 [웃음의 여유] 기술을 사용하는 힐러가. 아닌 게 아니라, 웃음 한 번이 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3주를 연달아 일해도 지치지 않고, 동료를 만나러 가는 출근 길이 즐겁고, 어려운 계약에 성공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동료와 안녕-하는 일. 모두 웃음 한 번이면 일도, 고생도, 모두 추억이 되는 거다. 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의 힐링을 주며, 힐을 받는 힐러. 그래서 여전히 난 힐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