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수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 게임을 하며 가장 짜릿한 순간은 언제일까. 타격감? 만렙을 찍은 순간? 내 생각에 짜릿함을 결정하는 8할은 게이머들의 칭찬이다. 서로를 탓하고 도발하며 살기가 넘실대다가도, 한 번의 슈퍼-플레이를 칭찬해 주는 게임 세상. 온라인 게임에서 채팅이 없었다면 이토록 많은 싸움이 없었겠지만, 수많은 사람을 이어주는 마법 또한 채팅의 몫이다.
재미나라, 야후! 꾸러기, 주니어네이버, 메이플스토리, 미스터 해머, 귀혼, 오투잼, 크레이지 아케이드, 카트라이더, 알투비트, 테일즈런너, 서든어택, 쿠키런, 오버워치, 배틀그라운드,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 어몽어스, 슈퍼 마리오 시리즈, 동물의 숲..
닌텐도, 컴퓨터, 모바일을 가리지 않고 게임을 시작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칭찬은 힘이 세다. 칭찬은 매일매일 새롭고 늘 짜릿하다. 여태 받은 칭찬을 캡처하고 저장해서 폴더에 모을 정도로. 이런 칭찬 중독 상태에도 전혀 기쁘지 않은 ‘칭찬’이 있다.
‘오, 여자치고 잘한다.’
어떤 마음인지 가늠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칭찬일지 모른다. 여태 ‘여성 게이머’를 못 봤을 수 있다. 여성 지인이 없을 수도, 주변 여성이 게임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게임 못 하는 컨셉의 인터넷 방송인만이 알고 있는 여성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칭찬 아닌 칭찬’을 듣는 나는 또렷하게 키보드와 마우스 위의 여성 게이머였다. 그래서 여자 ‘치고’라는 말을 들을 때면 그 사람을 치고 싶단 생각이다. ‘여자는 게임 못하니까’ 하며 선을 그어둔 것만 같아서. 그 금을 넘지 못할 것 같아서.
더 슬픈 건 ‘여자 치고 잘한다.’ 정도면 양반이란 거다. 게임판을 편치 않게 만드는 채팅은 이게 다가 아니다. 서로를 ‘형’이라 부르며 여성 유저를 지워버리기는 기본이요, 대뜸 ‘sex’하고 문란한 채팅을 치는 녀석 하며, 설명도 필요 없는 ‘여자 있네? 졌다’, ‘우리 팀에 계집 있음’, 온갖 성희롱을 담은 닉네임, 패드립...
20년 차 게이머는 굴복하지 않는다. 참지 않는 성격과 빠른 타자 속도의 찰떡궁합으로 키보드 워리어에 빙의할 뿐이다. 꼬박꼬박 신고도 빼먹지 않고. 왜 그런 채팅을 치는 사람과 똑같아지려고 하냐고 생각이 드는가? 정작 나는 오버워치 8년 생에서 신고 한 번 당한 적이 없다. 욕설 한마디 없이 상대를 비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시비를 걸거나 성희롱하는 녀석들을 보면 이를 꽉 깨물고 게임에서 이긴다. 그리고 채팅 한 줄 남긴다. ‘AI랑 연습하고 오거라' '혹시 전력을 다한 거 아니지?'
중요한 건 어떤 말을 하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빨리 치고, 얼마나 빨리 상대가 채팅 치기 전에 나가느냐다. 친구들은 비꼬기 기술을 보며 ‘차라리 욕을 해’ 한다. 하지만 이건 나름대로 20년간 길러온 상처받지 않는 법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나면 적어도 나에겐 웃고 끝낸 일이 된다. 그러지 못했던 10대에는 채팅 한 줄 한 줄이 마음에 박혔다. 정말 내가 잘못해서 게임이 졌나? 이제 게임 그만둬야 하나? 하면서.
왜 온라인 세상에서 이렇게 열 올리냐고? 그럴 수밖에 없다. 게임이 현실 세계와 닮아있는 탓이다. 오히려 더하면 더 하다. 소싯적에 오락실 좀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알 테다. ‘게임-매너’가 얼마나 중요한지. 오락실에서는 상대가 게임을 ‘더럽게’ 하면 벌떡 일어나 상대 얼굴부터 확인했다. 그 눈빛이 무서워서라도 조롱은 금물이었다. 매너가 즐거운 게임판을 만드는 거란 말이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모른다. 그래선지 온라인에서는 온갖 일이 펼쳐진다. 사기에, 성희롱에, 협박에. 욕은 기본 탑재 기능이다.
이렇다 보니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클린-유저는 귀하디 귀하다. 게임에서 만난 귀한 랜선 인연은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이다. 얼마나 귀하냐면, 20살 때 같이 게임을 했던 중학생이 올해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도 여전히 같이 게임을 할 정도다. 어떤 게임 인연은 때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이보다 편하다. 세상 속에서의 날 전혀 모르지만,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존재가 된다. 게임을 쉬는 시간마다 사는 얘기, 고민이 넘실댄 까닭이다. 온라인 자아는 이런 매력이 있다. 어떻게 판단될 거란 기대나 걱정이 없는 것. 그래서 결국 온라인 게임을 사랑하게 만든 것이 채팅이고, 싫어하게 만드는 것도 채팅인 거다.
적당한 도발과 담백한 칭찬은 짜릿함을 더하는 법이지만, 즐겁자고 하는 게임에 물 흐리는 유저를 보면 화딱지가 난다. 애증과 애정으로 점철된 게임. 안 하면 되지 않냐는 엄마의 질문에, 김초엽 작가의 <방금 떠나온 세계> 속의 한 구절로 답했다.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