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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유튜버의 회고록

by 김보경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고 싶었다. 취업은 싫고, 웃기긴 좋고. 마침 전공도 영상이겠다, 유튜브로 성공하면 취업 안 해도 되지 않나? 그렇게 100만 구독자를 꿈꾸며 ‘떡상’을 원한 셋이 모여 유튜브를 시작했다. 우린 학과 학생회를 같이했던 친구였다. 어디서 빠지지 않는 목청과 들끓는 텐션의 소유자가 셋이나 모이니. 서로에게 당연하게 끌렸고, 끔찍이도 붙어 다녔다. 단과대학에서도 '3 대장'이라 불릴 정도였으니, 유튜브를 시작한다고 하니 주위에선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한 나. 그리고 막 학기를 맞이한 S와 Y.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1년이 전부였다. 얼마나 잘되고, 얼마나 못되든 1년은 해보자는 약속으로 뭉쳤다.


“우리끼리 노는 거만 찍어도 웬만한 영상보다 재밌지 않나? 안되면 그만이고.”


말로는 쉬웠고, 일이 되기 전엔 쉬웠다. 졸업이라는 벽, 유튜브 시장에 들어가긴 이미 '늦었다'라는 훈수, 조회 수 한 번에 웃고 울던 시간. 수익 한 푼 없이 야속하게 다가오는 마감. 실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날 믿는 만큼, 친구를 믿었다. 적어도 이들과 함께라면 아이디어 샘이 마를 일은 없다고. 우리 영상을 보면 한 명은 무조건 웃는다고. 나에게 웃긴 건 내 친구에게도 웃겼으니까. 그렇게 서로 한 스푼씩의 유머를 더하기를 반복했다.

채널을 열기 전에 우리에겐 대원칙이 있었다. ‘부모님도 함께 볼 수 있는 영상을 만들자. 누구도 불쾌하지 않은 유쾌함을 잊지 말자.’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광대로 자라온 터라, 우리의 한 치의 실수에도 상처받는 사람이 생기기 일쑤였다. 우렁찬 목소리를 뽐내는 덕에 말소리가 크게 공명함을 알았다.


타인의 웃음으로 에너지를 얻어왔기에, 자신을 낮추거나 누군갈 찍어 누르는 농담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희극인도 아닌데 개그 사명감이 참 투철하기도 했다. 한 친구의 말마따나 ‘개그비’를 받는 것도 아닌데)


채널이 수명을 다한 지도 3년. 철 지난 채널을 봉쇄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웃음의 철학 덕분이다. 흔들릴 때마다, 편집에 덜고 더함을 판단할 때마다 유쾌함이 비소를 이기지 못하도록 고민했다.

대단한 것 같지 않은 이름 ‘김사장’도 그런 의미를 담았다. 우리는 모두 김 씨였고, ‘사장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유튜브로 돈을 벌고 싶었고, ‘김사장’하면 중년 남성이 아닌, 우리의 얼굴이 떠오르길 바랐다. 그리고 그런 김사장을 키워준 우리의 팬들에게는 ‘회장님’하고 불러보고 싶었다.

고민 끝에 만들고 운영했던 채널이지만, 어린 날의 영상을 마주하기는 여전히 부끄럽고, 안쓰럽다. 그때와 똑같이 ‘알피’, ‘DJ구’ 분장을 하고, 물세례를 맞는 건 일도 아니다. 다만 영상 속 내가 안쓰러운 건, 유튜브로 성공하고 마리란 야망이 가득해서다. 취업하지 않겠단 마음, 졸업 후에 방황하지 않고 싶단 꿈, 영상을 보는 사람들을 웃기고 말겠단 다짐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편하지가 않다. 그때 우리에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난 유튜브를 좋아하지 않았다. 애독하는 유튜브라고는 북튜브, 야구, 고양이가 전부였다. 유행하는 영상도, 유명하단 유튜버도 몰랐다. 모든 유튜브 영상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유튜브’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꼈다. 날 것의 ‘유튜브 감성’이 싫었다. 구독을 요청하면 ‘을이 되기’ 자처하는 것 같고, 인간성을 내려놓은 영상의 조회가 높은 세태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앉으나 서나 기획 회의가 길어졌다. 소위 ‘몰카’라고 하는 깜짝 카메라, 실험 카메라가 대유행하던 시절. 한차례 조회수 ‘떡상’의 맛을 보았던 우리에게 주류의 흐름에 타는 데 큰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 한 번 해보자”

그런 마음으로 ‘몰카’ 영상을 올렸다. 그때부터였다. 우리 영상을 지속해서 올려주겠다는 SNS 페이지가 생기고,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영상을 퍼가고, 댓글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때의 희열은 가끔 그립다. 여전히 짜릿하다.


‘우리 또래에 이렇게 웃긴 여자애들이 있다는 게 뿌듯하네’


이런 댓글을 닳도록 봤다. 몇 차례 주류의 흐름에 맞는 영상을 올렸고, 조회수와 구독자는 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늘어가는 댓글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비어 가고 있었다.

‘왜 <인터넷 소설 명대사 읽기>, <알피 패러디>처럼 우리가 좋아하는 영상은 사람들이 안 보고, 하고 싶지 않은 ‘몰카’ 영상은 사람들이 좋아할까?’ 그때부터 서서히 힘을 잃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건 패러디, 그리고 부산 사람 특징 같은 영상들.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몰카’. 하고 싶은 것과 시청자가 좋아하는 것의 괴리감을 여실히 느꼈다. 와중에 휴학과 졸업으로 우리의 시간도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을 병행한 S와 Y는 지쳐갔고, 휴학 생활 동안 통근을 하던 나는 조급했다.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고,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채널은 안녕이라는 말없이 막을 내렸다.

치기 어린 날을 돌아보면 흘러가는 농담을 붙잡아 영상으로 남겨둔 우리에게 고맙다. 학교에서 구제 모피를 입은 채 복도에서 텀블링을 돌고,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댄스 배틀을 하고, 과방에서 노란 피부색을 가진 알피 분장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잃을 건 시간뿐이고, 모든 웃음이 환희로 남았다. 빛나던 그때의 우리를 회고하며, 이제야 미련 없이 우리 채널을 완전히 놓아줄 수 있을 것 같다. 안녕, 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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