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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기억하고

타자기와 텍스트

by 김보경

두 번째 애정 컬렉션은 먼지 쌓인 타자기다. 타닥, 타닥- 팅-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한 문단이 그려지고 지워지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타자기는 설 자리가 없다. 오타 한 번이면 곧장 쓰레기통 행이질 않나. 프린터마저 무한 잉크인 시대에 잉크 리본 교체는 또 웬 말인가? 하지만 효율을 최고로 치는 사회에도 비효율적인 타자기에는 낭만이 있다. 900타로 자판을 넘나드는 키보드 경주마는 타자기로 느림의 미학을 배웠다. 가속 붙은 손으로 자판을 놀리면 느린 생각의 흐름에 글이 길을 잃곤 한다. 타자기는 다르다. 손이 빨리 나서면 타자기는 ‘워-워-’ 하며 말의 속도를 늦추는 기수처럼 자판이 어그러진다. 그렇게 생각과 손의 속도를 맞추며 문장의 끝을 맺는 순간. ‘땡’하고 타이머가 울린다. 레버를 미는 그 순간, ‘어쨌든 글의 끝을 맺음’ 인증받는 셈이다.


초등학생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기 바란 이유는 새 친구도, 새 담임선생님도 아닌 새 교과서였다. 교실 앞에서 교과서를 받는 날이면, 굳이 책가방에 이고 지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곤 국어 교과서를 대번 읽었다. 텍스트 사랑은 나에게 꽤나 유래가 깊다. 당시에는 으레 학생들은 모두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진정으로 글을 사랑하게 된 더 큰 이유는 활자로 새기지 않은 말이 휘발되는 탓이다. 2년 전, 25살. 6개월 동안의 배구 수업을 듣던 중, 코치님이 백날 이야기해도 도통 이해가 안 됐다. 팔이 아니라 몸을 들어 올려라? 때리지 말고 밀어라? 공을 잡아둬라? 그날그날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을 메모하고 나서야 마음으로 이야기가 들렸다. 배움의 순간을 잡아챈 거다. 이처럼 텍스트로 읽고 쓰는 것은 흘러가는 매 순간을 붙잡아 갈피를 꽂는 일이었다.


문제는 사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거다. 다음의 책 목록의 부제는 '왼손이 책 산 걸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 김초엽 작가의 <우리들이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표지와 사인본 멘트가 달라서 에디션 버전마다 샀다. (물론 실제로 읽은 책은 처음 산 오리지널 버전뿐이다.)

- 글자가 너무 작아서 읽지도 못하면서 귀엽다는 이유로 산 손바닥 크기의 <인간 실격> 미니 미니북

- <해리포터>에 나오는 편지와 지도가 담긴 입체북 <해리포터 미나리마 에디션>.

(하지만 입체북이 망가질까 봐 첫 페이지도 열지 않은.. )

읽으면 책이고 읽지 않아도 컬렉션이라는 합리화로 책은 이리도 쉽게 사지는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신간이라, 좋아하는 감독님의 첫 에세이라, 삽화가 좋아서, 제목이 맘에 들어서... 이렇게 얕고 열린 마음으로 책을 사재 꼈다. 이 참에 읽히길 기다리며 노려보는 책에 사과를 구한다.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면서도 물성의 책을 놓지 못한 이유는 하나다. 독서는 하나의 체험이라는 이유. 저변이 넓어지는 쾌감과 한 권을 독파하는 희열, 그리고 달라진 시야는 물론 중요하지만, 독서는 내게 감각의 스위치를 켜는 시간이다. 손끝에 닿은 책엽, 풍기는 잉크 향, 필자의 언어 밑에 다는 댓글. 이 모든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어쩌겠는가. 책장이 희생하는 수밖에!


출퇴근길과 여행길의 기차, 지하철, 비행기도 애용하는 ‘독서 맛집’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집 독서의 단골이다. 단골집에서 하는 독서는 깊고, 즐겁고, 느리다.


* 준비 단계는 아래와 같다.

1. 따끈따끈하게 샤워를 마친 노곤한 몸을 준비한다!

2. 불을 끄고, 침대 간접조명을 켠다!

3. 책과 어울리는 향을 뿌린다. ‘오늘은 교보문고 향, 너로 정했다!’

4. 책 분위기와 맞는 가사 없는 노래를 튼다!

5. 연필과 문진을 준비해서 눕는다!


책 읽는 순간마다 온 에너지를 다해서일까? 이렇게 한 자 한 자에 힘을 주어 쓴 글자와 깊이 읽은 책은 기억할 순간을 만들고, 떠올리고 싶은 순간을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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