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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Oct 22. 2021

아니 뭐냐 이게 뭐냐

음악 놀이의 시작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집에는 각진 검은색 전축(위 사진 참조)과 세미클래식 전집이 있었다. 우리 자매들은 심심할 때마다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템포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고 서사가 뚜렷한 곡을 따라 맞춤 연기를 하며 놀았다.



그중에서도 ‘숲 속의 대장간(Die Schmied in Walde)’이 가장 재미있었다. (페이지 하단 영상 참조) 이 곡은 아침 해가 뜨는 장엄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자는 척을 하다가 목관악기가 연주하는 새소리가 들리면 천천히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손차양을 얹고 먼 풍경을 둘러보다 오늘의 일감을 꺼내 망치를 드는 시늉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망치질 파트가 곧 나오기 때문이다. 뚱, 땅, 뚱, 땅, 뚱땅, 뚱땅, 뚱땅뚱땅…. 리듬에 따라 점점 빠르게 망치를 내리치고는 흥겨운 후렴에서는 염소처럼 뛰면서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낄낄 웃다가 침을 흘릴 만큼 신이 났다. 나이차가 많은 언니들은 곧 시들해졌지만 나는 초등학생 때까지 이 뮤지컬 놀이에 몰입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파트별로 방법을 알려주면서 연출자처럼 연기를 지시하고 소리쳤다.


“자, 여기서 뛰어! 뛰어!”



오디오나 악기가 없을 때는 혼자 즉흥으로 지은 노래를 불렀다. 절대음감도 아니고 완성도 높은 곡을 만든 것도 아니었다. 내가 만드는 노래들은 목소리로 남기는 낙서에 가까운 것이어서, 심심할 때 도화지에 뜻없는 그림을 비뚤비뚤 그리듯 음정에 구애받지 않고 입에서 흘러나온 대로 부르곤 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성대의 요정 ‘흥얼이’가 살고 있다고 믿는다. 마음속 노래가 입 밖으로 흘러나가도록 도와주는 존재인데 다만 발견된 흥얼이와 미지의 흥얼이가 있을 뿐이라고. 흥얼이는 마음에서 입까지 직행 도로를 만들어 놓고 작은 발상이나 감정이 즉흥적으로 가락을 타고 밖으로 나가도록 얼쑤절쑤 흥을 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숨바꼭질을 하다가 작은 광에 숨을 때, 딱딱한 포대자루를 베고 드러누워 벽에 두 발을 척 올리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떠오른 생각에 멜로디를 붙이는 것이다. 내부가 민트색 페인트로 칠해진 1평 남짓한 공간에 숨어서 조용히 부르던 짧은 노래. 기억나는 부분은 짧다.



숨바꼭질 중에 왜 지게가 생각났는지, 당시 지게가 나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좁은 공간에 혼자 누워 탁 트인 산에 오르는 걸 상상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지만 놀이 작곡에서 맥락을 찾는 일은 큰 의미가 없다. 지루한 놀잇감에 흥미를 잃은 아이가 어떤 장비나 재료도 없이 창조성을 발휘할 방법이 그저 노래 짓기뿐이었을 것이다. 혼자만의 놀이였기 때문에 내 노래를 누구에게 들려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기록할 방법을 몰라 기억에서도 금방 휘발됐다. 대부분은 그랬다.




하지만 한 곡이 남았다.

유아기의 대표작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아니 뭐냐 이게 뭐냐





아니 뭐냐 이게 뭐냐
어젯밤에 잡힌 노루
도망 도망 뛰어봤자
따당 따당 도망갔네

사냥꾼이 (음음음 음음음)
이젠 활로 (활로!)
쏴아 쏴아
노루는 꽥

아니 뭐냐 이게 뭐냐
어젯밤에 잡힌 오리
이젠 이젠 구워먹자
맛있게 먹자

(악보 하단 첨부)




절(verse)과 후렴(chorus)의 구분이 뚜렷한, 나름의 서사가 담긴 곡이다. 일부 내용의 잔혹함에 양해를 구하고 싶다. 성인이 이런 곡을 썼다면 동물 보호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이 곡을 만들 당시는 겨우 예닐곱 살이었으니.



어린 시절에 만든 수많은 노래들은 기억에서 사라졌고 이 곡만 구전민요처럼 남았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언니가 내 노래를 귀 기울여 들은 뒤 가사를 적어주고 멜로디를 따서 실로폰으로 연주해주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실로폰으로 이 곡을 치는 동안 화끈거리는 무언가가 내 얼굴을 스캐너처럼 훑고 내려갔던 것 같다. 누군가가 내 볼품없는 낙서를 액자에 끼워 걸어준 기분이랄까. 형체 없던 노래는 그때에야 비로소 감각할 수 있는 대상이 됐다.



언니가 즉석에서 외장하드 역할을 해준 덕분에 이 노래는 기억에 또렷이 남아 놀이터에서 발로 모래를 툭툭 차면서도, 심부름 가는 길에서도, 새벽에 혼자 눈을 떴을 때에도 이따금 흥얼거렸다. 10대, 20대에도 남몰래 나직이 부르곤 했다. 정말 나 혼자만의 구전민요가 된 것이다.


지금 불러보라고 해도 정확히 따라 부를 수 있다. 30대 후반의 흥얼이는 여섯 살 때보다 더 수줍어하겠지만 그래도 이 노래는 선뜻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언급한 '숲속의 대장간'은 이런 곡입니다. 대장장이 망치소리는 1:40에 나옵니다. (ㅋㅋ)


https://youtu.be/7lrSqLNQZ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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