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보영 Oct 24. 2021

이 길이 아니라는 초특급 확신

놀이는 놀이일 뿐, 전공하지 말자





일주일에 한 번씩 피아노와 작곡 레슨을 받았다. 피아노는 일대일로 교회 반주자 선생님이 봐주시고 작곡은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남자 선생님께 그룹 레슨을 받았다. 나 말고도 남학생 두 명, 여학생 두 명이 더 있었다. 시키는 대로 화성학 책을 사서 문제를 풀고 16마디의 곡을 써서 매주 검사를 받았다.



바이엘, 소나타 구경도 못해본 나의 첫 피아노 곡은 베토벤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이었다. 선생님은 그리 어렵지 않다며 메트로놈을 천천히 맞춰놓고 차근차근 쳐보라고 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악보를 볼 줄도 모르는데 베토벤 소나타라니! 화성이라고는 다이아토닉 코드밖에 모르는데 클래식 화성학이라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선생님 동생이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을 연습실 삼아 매일 드나들었다. 처음으로 경험한 피아노 학원은 ‘바이엘과 소나타, 하농과 에튀드가 부정확하게 뚝뚝 끊어지며 사방에서 들리던 혼돈의 공간’이었다. 거기서 나는 낮은음자리표 오선을 손가락으로 세가며 왼손 파트를 더듬더듬 연습했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라’가 ‘도’야. ‘라’가 ‘도’야.”

(낮은음자리표는 높은음자리표의 ‘라’ 위치가 ‘도’다.)



내가 피아노를 그토록 더럽게 못 치는지 몰랐다. 그동안 혼자 건반을 내리치며 쿵쾅쿵쾅 쳐 왔으니 자세부터 완전히 엉망이었다. 손목은 뻣뻣했고 손가락은 각자 따로 노는 법을 몰랐다. 눈으로 악보를 보면 동시에 손가락이 움직여야 하지만 나는 눈으로 왼손과 오른손 악보를 같이 보느라 눈이 빠질 것 같았다. 속으로 ‘라가 도야, 라가 도야’만 주문처럼 반복했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날뛰고 가끔은 눈앞이 하얗게 되기도 했다. 악보를 봐도 손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것도 치지 못했다. 물론 컨디션이 좋을 때도 못 치긴 했지만. 그래도 억지로 붙드는 시간이 길어지자 전보다는 덜 끔찍하게 칠 수는 있었다.




작곡 레슨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클래식 작곡에서 나는 백치에 가까웠다. 레슨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이 ‘얘는 여길 왜 왔지?’의 눈빛으로 매 시간 나를 쳐다봤다. 아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나를 뺀 다른 아이들은 전부 ‘절대(로 내겐 없을 천재적)음감’이었고 음악이 자기 길이라는 확신이 분명했다. 자기들끼리 ‘절대음감 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한 명이 피아노를 아무렇게나 꽝 치고 ‘방금 뭐 쳤게?’ 물으면 다른 한 명이 열 개의 음정을 줄줄이 다 맞히고 둘이서 까르르 웃었다. 작곡과 입시에는 저런 애들이 수백 명 모인다던데 큰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나는 입시 잔치에서 자리만 깔아주다 튕겨져 나올 것 같았다.



화성학을 조금씩 배우고 시창과 청음도 약간은 가능했지만 작곡은 또 다른 문제였다. 낮은음자리표도 겨우 보는 마당에 화성학 법칙에 맞게 풍성한 화성까지 넣어 괜찮은 멜로디를 얹는 건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숙제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다 레슨 직전에야 울며불며 곡을 썼다. 주말에 놀아도 노는 게 아니었다. 불안과 스트레스가 말도 못했지만 레슨비를 생각하면 마음대로 땡땡이를 칠 수는 없었다. 시작했으니 일단은 이어가야겠다고 다짐했으나, 한 가지 일을 정해진 대로 꾸준히 하는 작업을 무척 어려워하는 기질 때문에 더 힘들었다. 클래식 작곡에 소질이 없다는 건 빨리 직면했다. 소질이 없으니 더 정진해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 몰라 질질 끌려다녔다. 입맛이 없어지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체중이 확 줄었고 밤이면 나도 모르게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잤다.



고3이 되어서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엄마가 대출을 받고 돈을 꿔서 내 레슨비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건 망해가는 회사 주식을 사는 것보다 위험한 일이다. 이 상태로 입시에 들어가면? 재수를 하면? 아니, 음대에 진학해도 등록금은 어떻게 내지? 눈앞이 캄캄했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8월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나는 두 선생님께 레슨을 더 받지 않겠다고 전화로 통보했다. 거절을 말해야 하는 어려움보다 입시 준비의 괴로움이 압도적으로 컸기 때문에 담담하게 말씀드릴 수 있었다. 그날로 모든 게 정말 끝이 났다. 그리고 모처럼 다리를 뻗고 편하게 잤다. 수능 보기 3개월 전에 무모하게 내린 결정일지 모른다. 그때는 작곡 입시 레슨보다 진로 문제로 불안한 게 천만 배는 낫다고 생각했다. 이제라도 그만두는 게 맞다는 우주적인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음악을 하면 안 돼. 우리 집 형편에 어울리지도 않았지만 그걸 감당할 만큼의 자질도 없잖아.



배움이 날개를 달아주는 경우도 있다. 탄탄한 이론이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도 맞다. 그 길이 맞는 사람에겐 그렇다. 그 음악은 내 길이 아니었다.



결국 예체능계열을 유지한 채 수능을 봤다. 자신 있었던 언어는 처참히 말아먹었고 수학은 일찌감치 찍은 뒤 자버렸으나 기대보다 괜찮았다. 합쳐보니 그저 그런 수준이 된 점수를 받아 들고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너네 집이 어려우니까 전문대 가서 빨리 취직하는 건 어때? 안경 만드는 학과 나오면 돈 잘 번다더라. 그게 부모님 도와드리는 거야.”

“그건 싫어요.”

“그럼 뭐하고 싶은데?”

나는 생각나는 대로 답했다.

“그냥… 방송 쪽? 영상 연출 같은 거요.”

선생님은 배점표를 한참 보더니 말했다.

“그거 문창과 가도 할 수 있을 거야. 하나만 써 봐. 나머지 두 개는 너 쓰고 싶은 데 쓰고.”



결국 선생님이 추천한 학교에 진학했다. 입시 음악에 달려들었다가 새파랗게 젖고 돌아온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커버이미지 출처 Photo by Siora Photography on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