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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Nov 07. 2017

만나본 적 없는 네가 그리웠다



햇수로 8.

결혼하기 전까지 언니네 집에 살면서 조카 삼 남매의 성장을 고스란히 함께 지켜보았다. 덕택에 육아의 단맛과 쓴맛을 어느 정도 경험할 수 있었는데, 언니는 내게 이 시간이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며 너는 분명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자주 말해주었다. 고마운 말이고, 또 그만큼 내가 조카들을 정말 사랑하지만 앞으로 육아를 더 할 에너지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언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으로선 애를 낳을 생각이 없어.”




이상한 일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대단한 부담도 없었으며 별로 조급해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새 가족을 꿈꾸고 있었다. 언젠가 아이를 갖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앞으로 만날 그 아이를 이따금 혼자 그려보았다. 이름을 지어서 불러보고 싶었다. 지금은 손에 닿지 않지만 만져보고 싶었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온다고 들었다. 어떤 어른들은 그걸 보고 ‘때가 됐다’고 표현한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지인들의 임신 소식을 듣고 축하와 축복 이상의 묘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잘 몰랐으나 몇 번 반복하며 알게 됐다. 깊이는 얕지만 그건 분명 부러움이었다. 세상에. 내가 임신하고 싶어 할 줄이야!



결혼 직후 처음에는 당분간 신혼 생활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렇게 10개월쯤 지났을까? 마트에 가면 전에는 안 보이던 어린아이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같이 예뻐 보였다. 흥미롭게도 남편 또한 언젠가부터 밖에 나가면 ‘저 애 귀엽다!’ , ‘아기가 정말 예쁘다’라고 속닥거리곤 했다.

아, 정말 그때가 온 것인가. 우리는 슬슬 임신을 준비하기로 했다. 어디서 들어본 대로 엽산도 사고, 인스턴트식품도 줄이고, 생협에 가입해서 양질의 농산물을 먹기로 했다.




사실 나는 이미 태명을 지었다. 남편과 ‘썸’조차 타기 전이었으니 아주 오래 전에 생각해둔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 봄을 맞을 때였다. 영원할 것 같은 추위가 거짓말처럼 물러가고, 뭐 잘한 것도 없는데 온 세상이 내게 꽃다발을 안겨주는 계절. 마음의 겨울도 언젠가 분명 끝날 것이란 소망을 주는 계절. 죽은 듯 멈춘 자연 세계에 새 활기를 내려주는 마법의 시간. 토르소 같은 가로수에도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이 움트는 따뜻한 시절. 순환의 한 고리를 돌고 새롭게 태어난 어린 생명이 세상을 채우는, 새 봄. 기적이다. 그래서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이름은 ‘새봄’ 으로 짓고 싶었다. 이름의 의미도 정리했다.



영원한 겨울은 없으며 봄의 약속은 이루어진다




내가 태명까지 정했다는 걸 듣고 남편은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

“혼자 너무 멀리 간 거 아냐?”

그는 아기가 생기고 나서 같이 정해야 하는 게 맞지 않냐고 물으며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생리 예정일이 훌쩍 지나도 소식이 없기에 ‘혹시나’ 싶었다. 설마 임신인가? 남편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나 아무래도 임신한 거 같아 . ”

그러자 그가 내 배에 대고 말을 건넸다.

“새봄아, 너 혹시 거기 있니?”

남편이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했으니 태명은 새봄이로 잠정 결정된 셈.

그리고 그다음 날, 임신이 아닌 것을 확인했다.



그 후 우리는 ‘아직은 막연하지만 앞으로 찾아올 그 아이’를 지칭할 때 새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잘못된 생활 습관에 대해 말할 때면,

“새봄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

유아용품을 볼 때면,

“새봄이가 생기면 우리도 저런 걸 사겠지?”

심지어 남편의 건강을 챙기면서도,

“새봄이는 지금 여보 몸에도 있을 거야.”

이런 식이었다. 덕분에 임신하기 전부터 미래의 아이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렇듯 새봄이는 세상에 오기 전에도 우리와 늘 함께 있었다. 아직 존재하지도 않으며 본 적도 없는 그 아이가 나는 이따금 그리웠다. 이름을 불러주고 보드라운 살결을 만지고 싶었다. 우리는 이제 곧 만나야 할 사이였다.




그렇게 한두 달이 더 지났다.

며칠 새 몸이 좀 이상했다. 생리 전 증상이라고 하기엔 평소와는 분명 달랐다. 방광염을 의심할 정도로 요의를 자주 느끼고, 잠이 부쩍 많아졌으며, 이상하게 어질어질하기도 하고, 아랫배가 바늘로 찌르듯 콕콕 아팠다. 이미 한 번 잘못 짚은 적이 있어서 임신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다가 혹시나 하면서 임신 초기 증상을 검색해보았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지금 내 상황과 흡사했다.


나는 남편에게 달려가 말했다.

“이것 봐 . 나도 지금 이래. 이것도! 이것도! 설마 임신인가?”

남편은 확실한 결과를 원했다.

“그냥 가늠만 하지 말고 테스터를 써보는 건 어때?”

“아니야, 임신이 아닐 텐데 그걸 왜 써.”

“아닌지 맞는지는 써봐야 알지.”

“아니야, 그거 비싸단 말이야. 지금 쓰면 오천 원 버리는 거야.”

“아, 내가 오천 원 줄게, 줄게!”

결국 테스터를 쓰기로 했다.

“아, 맞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임신 소식을 처음 알렸을 때 남편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면 그 서운함이 그렇게 오래가더라는 말.

“만약 임신이 맞으면 어떨 것 같아?”

남편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당연히 좋겠지.”

“아니야, 그 정도로는 안 돼. ‘저엉마알?’ 하면서 완전 펄쩍 뛰며 기뻐해야 해.”

그래서 예행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며 말했다.

“여보, 두 줄이야…….”

“저엉마알? 우와!”

남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펄쩍 뛰며 기뻐했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덩실덩실거리며 즐거워했다.


이렇게 연습 끝. 이번엔 실제 상황이다. 나는 비장하게 화장실로 들어가 테스터를 써보았다. 오른쪽에 먼저 붉은 줄이 생겼다. 뭐, 아니겠지. 안일하게 생각하며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왼쪽 칸에도 희미한 뭔가가 보이는 것이다. 이내 점점 선명해진다.

“어, 어어…….”

“뭔데, 뭔데! 나도 보여줘!”

남편이 밖에서 화장실 문을 쿵쿵 두드렸다. 그 와중에 선은 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정말 두 줄이었다. 맙소사! 세상에! 이럴수가!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 이것 봐…….”

남편에게도 테스터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조금 전의 연습을 다 까먹고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진짜… 임신이었어.”


당연히 마구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 둘 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뉴런처럼 번뜩이며 휙휙 지나갔다. 좋기도 한데 두렵기도 하고 감사하면서도 떨리고 걱정도 앞섰다. 나는 얼마나 겁 많고 심약한 사람인가. 한때는 꽤 낙천적이라고 자부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삶에 별일이 없어서 드러나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뻤다. 깊고 진한 기쁨은 웃음만으론 표현되지 않으니까. 우리는 말없이 오래오래 꼭 안아주었다.




아직 본 적 없던 새봄이가 이렇게 현실 세계에 찾아왔다 .

겨울의 문 앞에서 새로운 봄 노래가 들렸다.    





새봄이의 세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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