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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Dec 19. 2017

고통은 얼굴을 바꾸고

출산 후 산모에게 벌어지는 일



              

            

출산이 끝이 아니었다.

산고는 지독하고 끔찍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출산 이후에는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 임신도 퍽 동물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출산 후로는 그냥 동물의 삶이다. 나는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처럼 살았다.




회음부 통증에 대해 많이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기가 워낙 적극적으로 돌진했는지 절개된 부분과 다른 방향으로 찢고 나왔다고 한다. 그 부분이 끝없이 나를 괴롭혔다. 상처 때문에 움직임이 힘들고, 그래서 몸을 지탱하려다 보니 손목과 어깨에 무리가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질 줄 알았는데 하루하루 더 아프다. 만져보면 환부가 퉁퉁 부어 있다.



훗배앓이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자궁이 수축되며 생기는 통증인데 초산보다는 경산일 때 더 심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초산이라고 해서 무시할 만큼의 고통은 아니었다. 분명 애를 낳았는데 왜 계속 배가 아픈지 의아해하며 배를 쓸었다. 장에 가스도 엄청나게 찬다. 복통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젖몸살. 출산한 날부터 모자동실을 하면서 모유 수유를 연습했다. 나오는 게 없어 그냥 물리기만 할 뿐이었고 언젠가 젖이 불어날 날을 꿈꿨다. 며칠 후, 젖가슴이 퉁퉁 부어 누워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옆으로 돌아눕기도 어려울 만큼 가슴이 딱딱해졌다. 생전 처음 느끼는 고통. 아기에게 젖을 물려도 몹시 아팠다. 유두가 썰리는 기분이랄까.



인간이길 포기한 듯한 겉모습도 그렇다. 며칠간 씻지 못해 엉키고 기름진 머리, 퉁퉁 부은 얼굴과 팔다리, 아기가 빠져나간 후 그대로 늘어진 배까지. 산후조리원에 온 후에는 모유가 뚝뚝 떨어져 옷이 다 젖고 온몸에서 젖비린내가 진동했다. 유축기로 젖을 짜고 있자니 자연히 한 마리 암소가 된 기분이 든다. 짜내지 않으면 유방 통증이 심해질 테니 피할 수도 없다.

장에 가스가 차서 시도 때도 없이 배출되는데 참기가 어렵다. 에티켓을 지킬 수가 없다. 오로가 변기에 묻는 것도 볼썽사납다. 이런 모습들과 증상을 남편과 공유하고 있다는 현실 역시 부끄러웠다. 좋은 점과 싫은 점 다 보는 게 부부 사이이고, 남편은 내게 정말 편안한 사람이지만 짐승 같은 내 모습을 보이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모처럼 거울을 봤더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이 꼴로 살았다니 충격이다. 팅팅 부은 얼굴에 두 눈은 아직도 물만두 상태이고 대충 질끈 묶은 머리는 제멋대로 엉켜 있었다. 거기에 모공이 훤히 보이는 피부까지 가관이었다.


조리원에서는 아기가 배고파하면 ‘수유콜’을 준다. 그러면 신생아실로 가서 아기를 받아 수유실에서 젖을 먹인다. 그러다 어느 날엔 아기가 급해 보였는지 아예 직접 내 방에 데려다주셨다. 배고픈 아기는 대성통곡을 했지만 나는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아 바로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다. 낑낑거리며 겨우 일어나 회음부 방석을 깔고 그 위에 앉기까지 아기는 계속 울었다. 내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으니 너도 나도 서럽구나. 그렇게 겨우 안아 젖을 물리면 또 유두 통증이 이어지고 내 몸이 무너져가는 느낌이 든다.




임신의 고통은 만삭 때 꽃이 핀다. 나는 유독 힘겨운 만삭을 보내면서 얼른 이 시기가 끝나길 바랐다. 출산은 그 자체로도 역대급, 우주급 고통이기 때문에 더 말할 것도 없다. 산고는 고통의 대명사로 비유되지만 무엇을 빗대든 그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출산 후에 고통은 얼굴을 바꿨다. 몸 이곳 저곳, 마음의 깊고 낮은 곳 여기저기에 침투하여 새로운 괴로움을 안긴다. 무언가 망가져가는 걸 온몸으로 느껴도 나아질 여건이 안 되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은 새 생명 앞에서 힘을 잃는다. 아기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감통의 효과를 얻는다. 젖을 물리는 게 아프긴 해도 아기가 열심히 빠는 모습을 보면 애간장이 녹는다. 내가 이렇게 아프지만 네가 잘 먹고 건강하다면, 하고 제법 엄마다운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근본적인 아픔과 괴로움이 줄지는 않는다. 출산 후 2주 동안 호르몬 작용으로 우울감이 생긴다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출산 이후에는 몸과 마음이 힘겨웠다. 나라고 인식했던 그 존재가 어디 있는지 아련하다. 여기 있는 내가 과연 내가 맞는지 자꾸 의심하게 된다.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 이것은 모성애로 극복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너무 우울해 하자 남편이 물었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사실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연대야.”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나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함께해줘. 나를 보조해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보도 나와 함께 양육에 주인 의식을가지면 좋겠어. 그러면 우울해지지 않을 거야.”

“알겠어. 그런데 나도 밖에 나가 돈 벌어야 하니까 늘 함께 있지는 못할 텐데.......”

“연대는 마음에서부터 함께하는 거라고 생각해. 잠깐 함께 한다 해도 여보의 마음과 태도를 나도 느낄 수 있을 거야. 한 발 뒤로 물러나 있지 말아줘. 그리고 여보가 양육을 적극적으로 담당하면 나도 돈 벌 수 있을 테니까 경제 활동에 너무 부담갖지 않아도 돼.”

남편은 내 말처럼 연대의식을 가지고 육아의 여러 과업을 자기 일처럼 배웠다. 덕분에 우울감에서 비교적 빨리 회복될 수 있었다.
(아기가 좀 더 자란 후 남편도 육아를 체화하면서 나도 비로소 경제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부양의 책임을 느끼던 남편이 가장 좋아했다. 가부장제 문화로 각자가 받은 부담과 스트레스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날 때 해결되는 것 같다. 지금은 일반적인 성 역할의 구분 없이 서로 배려하면서 육아와 가사와 경제활동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내가 엄마가 되어도 될까> 원고를 집필하던 풍경.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남편은 육아를 전담했다. 







사실 출산에 대해서는 준비를 좀 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시뮬레이션도 해놓아서 내게 어떤 일이 이어질지 예상하고 있었다. 출산 자체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예상과 실제는 역시 달랐지만 그래도 크게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진통이 짧은 편이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럼에도 출산을 경험한 이후 마치 자녀가 부모님의 장례에 대해 ‘호상’이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적어도 산모에게 ‘순산’이란 사어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애초에 출산이란 게 순할 수가 없다. 생전 처음 겪는 극악한 고통을 지나야 하는데 순하다니!



아이를 갖고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남들도 다 한다고 해서 덜 어려운 게 아니다. 아마 이 과정을 지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네 부모가 그랬듯 희생이 기본값이 되는 삶을 받아들이며 살 것이다. 그 굴레에 나도 막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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