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보영 Jan 23. 2018

육아 부부의 새로운 로맨스


                       

마음에 그릇 하나 품고 산다. 사랑이 채워지고 줄줄 새어나가기도 하는 그릇. 사랑이 차오르면 힘이 나고 선의가 저절로 생기지만 어떤 계기로 마음이 비어 가면 불평하고 계산하며 모든 일에 서러워지기 시작한다. 결혼 후 남편과 공동의 일상을 만들어가면서 작게 서운했던 일들이 모여 덜컥 마음을 사로잡아 버릴 때, 일일이 설명하기도 어려운 그 심정에 대해 나는 뽀로통하게 말하곤 했다.


마음 그릇이 텅 비었어.



그러면 남편은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진지하게 묻고 열심히 실천한다. 그 모습을 보면 다시 내면에 밝은 빛이 비치고 나는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마음 다 찼어!”



그릇을 채울 방법은 다양하지만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연애 시절에는 말과 행동으로 애정을 자꾸 확인하고 싶었다. 연애 전에 ‘썸’을 타면서 나는 두 번이나 남편에게 우리 관계를 물었고, 자기 감정을 잘 몰랐던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남편은 긴 고민 끝에 정중히 거절했다가, 나중에야 벼락처럼 자기 마음을 깨닫고 나에게 정식으로 고백을 했다.*(글 하단에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고민과 침묵을 기다리느라 정말 힘들었기 때문에 연애를 시작해서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은 그 점을 잘 알았는지 마치 직진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나 변함없고 확실한 어조로 애정을 표현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점점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의 사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을 했지요.





신혼 때는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마음이 채워졌다. 각자 핸드폰만 쳐다보는 시간 말고, 둘이서 같은 것을 보고 마음을 모으는 그런 시간. 오롯이 상대를 경청하는 대화, 함께 만든 음식을 먹는 일, 혹은 밖에서 즐기는 데이트로 나는 다시 살아갈 힘과 의지가 생겼다. 결혼 전처럼 필요한 걸 마음대로 살 수 없어서 욕망을 억누를 때면 쉬이 우울해지다가도 시기적절하게 예쁜 무언가를 구입하면, 혹은 남편에게 선물로 받으면 나는 사랑의 폭포 아래에서 등목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시원하게 애정을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아기를 낳고 모든 것이 변했다. 아기가 생후 1개월쯤이었을까. 남편이 말했다.

“출산하고 나서 여보가 부쩍 무뚝뚝해진 것 같아.”

그러면서도 내가 왜 그런지 안다며 이해한다고 했다. 사실 이런 말을 들어도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애정이 식었느냐 묻는다면 거기에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남편을 덜 사랑하게 되었나?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에 대해 생각할 에너지가 없었다. 내가 예전에 어떻게 그를 대했는지, 그게 지금과 어떻게 다른 건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의 말을 듣고 한번 차분히 생각해보았다.

아기를 사랑하는 일에는 에너지가 든다. 왜냐하면 사랑하기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아기를 사랑한다고 최면 정도는 걸어야 즐겁게 육아를 할 수 있다. 남들이 말하듯 모성애는 본능처럼 저절로 뚝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를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노력하는 이성의 작용에 가깝다. 물론 아이를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고 예쁘지만 양육에 따르는 모든 희생을 감당하려면 내 깜냥보다 큰 사랑이 필요했다.



출산과 육아는 여자의 인생에 너무 크고도 가혹한 변화를 안긴다. 출산 이후 닥친 모든 의무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무거웠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고난을 제공한 당사자는 바로 아기다. 내 몸을 만신창이로 만든 것도, 삶에 수많은 의무들을 얹어준 것도, 생활이 엉망이 되게 만든 것도 다 출산 때문이다. 따라서 아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키울 수 없을 것이다. 축 처진 마음을 일으켜서라도 아기를 사랑해야만 한다. 그 결정과 노력이 모성이다. 사랑이 저절로 퐁퐁 솟는 현상 말고, 사랑을 길어 올리는 의지가 모성애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나는 날마다 아기를 보면서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이렇듯 나는 아기에게 한계를 넘는 사랑을 주고 있다.



그렇다 보니 몸뿐 아니라 감정, 정서적인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다. 육아에는 감정 노동도 포함되는데, 내가 별로 즐겁지 않아도 아이 앞에서는 밝게 웃고 높은 톤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성의 힘을 총동원하여 감정을 조절한다. (사랑은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마음 그릇은 쉽게 말라붙었다. 사랑을 기초로 한 엄청난 희생과 봉사를 매일 매 순간 해야 하므로 바닥을 벅벅 긁어서라도 아기에게 쏟아줘야 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사랑의 가뭄이다. 그래서 남편을 관심 밖에 두었던 것 같다. 생각하고 보니 문득 미안했다.



본격 육아를 시작하고부터는 남편이 가사와 육아에 동참할 때에야 비로소 마음이 채워진다. 함께 있어도 그가 가만히 누워만 있다면 오히려 줄줄 새어나간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로 표현하고 그럴싸한 선물을 받아도 소용이 없다. 내 마음이 가리키는 참된 사랑은 온갖 집안일로 가득한 일상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었다.



마음의 그릇은 남편이 아기띠를 장착한 시간, 알아서 기저귀를 가는 횟수와 비례하게 채워졌다. 남편이 끼니를 준비하는 소리, 아기가 울 때 후다닥 일어나 달려가는 발걸음, 진심을 다해 아기와 놀아줄 때 들리는 부녀의 웃음소리로 나는 사랑을 확인한다. 남편과 아기를 집에 두고 나 혼자 외출을 하거나, 카페에서 작업하는 동안 그가 육아를 전담할 때 단전에서부터 에너지가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필요한 육아용품을 함께 찾아보며 구입하고 서로의 리뷰를 들을 때, 각자가 촬영한 아기의 사진과 동영상을 밤마다 공유하며 깔깔 웃을 때, 아기를 재운 뒤 문 닫고 나오며 오늘도 수고했다고 서로를 꼭 안아줄 때, 따뜻한 안정감이 든다.



집안일은 정말 끝이 없어서 때로는 둘 다 허리도 못 펴고 일만 하다가 하루를 다 보내기도 한다. 끼니때마다 “밥 차릴래, 애 볼래?” 피차 묻는 건 그리 로맨틱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힘겨운 삶이라 해도 둘이 함께한다면 몸은 힘들지언정 마음은 비워지지 않는다. 육아하는 부부의 로맨스란 이런 것이다. 연애와 신혼 시절과는 질적으로 다른, 동료애, 전우애, 휴머니즘까지 결합된 강력한 사랑. 힘들게 아기를 재운 뒤 방에 털썩 누워 그날의 힘들었던 일과 향후 계획 같은 이야기로 속닥거리다 함께 웹툰을 보며 낄낄거린다. 그러면 피로는 씻기고 나의 오래된 마음 그릇이 사랑으로 찰랑찰랑 차오르는 것이다.



세상에는 육아하는 커플이 얼마나 많은데 왜 이런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가 없을까. 설거지하고 빨래를 너는 남편의 뒷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설레는지 주부들은 알 텐데. 나에게 ‘사랑해’보다 더 달콤한 말은 이것이다.



내가 할게.



내가 아기를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여유는 남편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나를 살피며 필요를 채워주고, 내가 혼자 뒤집어쓴 기분이 들지 않도록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육아에 참여했다. 처음 아기를 키우다 보니 내 에너지를 전부 아기에게 쏟았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남편에게 따뜻하게 말할 에너지가 별로 없었다. 신생아 시기에는 오직 의사 전달을 위한 대화만 나눴던 것 같다. 하지만 남편은 그 와중에도 내 마음 그릇을 채워주려 노력했다. 그에게 퍽 미안하고 고마웠다. 만약 그가 나를 외면했다면 나는 가문 밑바닥에서 사랑을 벅벅 긁어내다가 상처 나고 지쳤겠지.



그 후 나 역시 힘을 일으켜서 남편을 어떻게 챙겨줄지 더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나에게 준 배려와 여유로 가능해진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우리는 항상 같은 편에 서자. 적이 되지 말자.”

오늘도 이렇게 로맨스를 유지해간다.






(휴대전화 앨범을 기준으로, 우리의 첫 가족사진과 가장 최근의 사진. 신기하게도 같은 친구가 찍어준 것. 우리 부부의 간격 변화가 인상적이지만, 관계의 깊이는 분명 더 깊어졌다.)






















* 예전부터 구독하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2015년에 처음 브런치 작가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쓴 글이 남편과의 연애 이야기였어요. 킥킥 웃으며 가볍게 읽을만한 글들입니다. 오랜 친구였던 저희가 어떻게 부부가 되었는지 궁금하시다면 <부부의 탄생> 매거진을 참조해주세요.


https://brunch.co.kr/@bo0/1





이전 12화 모유수유의 빛과 그림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