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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Jan 30. 2018

'아빠 육아'가 좋은 이유



            

‘아빠 육아’가 떠오르고 있다. 아빠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자란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자존감이 높고 정서와 지능이 발달한다고 한다. 엄마는 보호하고 교육하는 양육 패턴을 보이는 반면, 아빠는 아이의 도전을 지지하며 세계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실험을 통해 엄마와 아빠의 놀이 방법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했다. 엄마는 놀이 규칙을 직접 제시하고 그 틀 안에 머무는 데 반해, 아빠는 아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과정에 뛰어들어 틀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또 아빠와 허물없이 친밀한 아이들은 교우관계도 좋고 건강하고 안정적인 정서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들을 아빠들이 안다면 양육에 높은 의욕을 보일 것 같다. 매우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정보 하단 참조)



그럼에도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아빠 육아’라는 말 자체에 좀 거부감이 든다. ‘엄마 육아’라는 말은 딱히 없다. 그냥 ‘육아’라고 하면 당연히 엄마를 향하는 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만큼 그동안 아빠들이 육아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빠가 육아에 갖는 비주체적인 모습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는 말이다.



아빠의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기 위해 그 방식을 치켜세우는 것은 좋지만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엄마의 양육을 비교 대상으로 삼아 은근히 깎아내리는 흐름이 마음에 걸린다. 여태껏 엄마들의 양육을 당연하게 여겼으면서 이제 와서 그 방식이 아빠의 것에 비해 이런 점이 다르다고 말하기 좀 민망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 특징이라는 것도 너무나 주관적이다. 양육 방식은 양육자의 성향에서 비롯될 확률이 높고, 성향이라는 것은 개인차가 있기 마련이다. 대범하고 모험적인 엄마도 있고 좁은 울타리를 가진 아빠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엄마의 육아와 아빠의 육아를 각각 어떤 개념으로 묶어버리면 편견의 덫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특성이나 통계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니 한발 물러나서 엄마와 아빠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하자. 사실 나는 그래도 ‘아빠 육아’라는 단어가 멋지게 여겨지지 않는다. 육아는 당연히 부모가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빠 육아’는 기존에 가져왔던 명제, 즉 ‘육아는 엄마의 몫이다’를 조건으로 갖는다. 의외의 것은 특별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의외’는 보편성에 기댄 말이다. ‘아빠 육아’가 새삼스럽게 조명을 받는 것은 육아의 대상이 엄마라고 한정 짓는 보편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부부의 동등한 육아가 당연한 명제가 된다면 아빠의 양육 방식이 주목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마치 ‘엄마 육아’가 화제로 떠오르지 않듯이 말이다. 정말 마땅하게 여겨질 명제는 이것이라고 본다. ‘양육은 부모가 동등한 주체로서 함께하는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출산과 모유 수유만 빼면 아빠도 다 할 수 있어.




정말 그렇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한 성인이라면 누구나 육아할 수 있다. 다만 학습과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육아에 대해 학습할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육아에 대한 태도도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생활 역시 경험과 학습으로써 익숙해진다. 사회생활은 할 수 있지만 육아에는 서툴다면 그에게는 배울 의지가 더 필요한 것이다.



‘아빠 육아’의 전제는 또 있다. 육아는 단순히 아이와의 일대일 관계라고만 할 수 없다.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울 뿐 아니라, 아이가 먹을 것을 준비하고 온종일 늘어놓은 것을 치우는 일도 포함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쉽게 음식물이나 오물을 묻혀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옷을 갈아입는다. 때마다 아이 옷을 빨고 널고 개키는 일들도 육아다. 아이가 자라며 필요한 것들을 살피고 준비하는 것 또한 그렇다. 일부 매체에서 말하는 ‘아빠 육아’에는 이것이 빠질 때가 많다. 그들의 ‘아빠 육아’에는 아이를 키우는 데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궂은일은 포함되지 않는다. 오직 일대일의 돌봄과 놀이에 집중된 것이다. 그 사이에 누군가는 그 궂은일을 도맡는다. 진정한 아빠 육아가 이루어지려면 아빠 역시 육아에 따르는 갖은 가사를 그 일부라도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긴 비판을 써놓았지만 나 역시 남편이 아이를 돌보는 게 좋다. 우리는 둘 다 프리랜서라서 함께 아기를 볼 시간이 많은데, 솔직히 아직까지 엄마와 아빠의 양육 방식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아이가 더 자라면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도 아빠도 그저 한계를 갱신하며 성장하는 중이다. 남편은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 옷을 빨고 널고 개키며, 아이가 쓴 식기를 닦아놓고 아이의 방을 청소한다. 앞서 말한 진정한 ‘아빠 육아’를 실천 중이다. 또 우리는 아기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연구와 토론도 하면서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기의 성장과 변화를 함께 지켜보고 기뻐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다.




아빠와 딸, 제주의 일 년




이렇듯 남편이 육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면서 나는 ‘아빠 육아’의 비밀을 깨달은 것 같다. 한 인간의 정서 발달 과정에는 양육자의 정서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나만의 가설일 뿐이지만, 아빠와 친밀한 아이들이 안정적인 정서를 가진 이유는 아빠가 아이와 친밀해지는 시간 동안 엄마가 쉼과 여유를 얻었기 때문 일 것이다. 친밀함이 형성되려면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긴 시간 동안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녀의 마음과 필요를 헤아리는 남편을 두었다면, 그가 양육하는 시간만큼 아내는 숨을 돌리며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자녀를 대했으리라. 결국 아내와 남편의 균형 있는 양육이 두 사람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부부 관계도 당연히 좋아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자녀의 정서 발달에 큰 도움을 준다.



아기를 정말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육아가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안 자고 울기만 하는 아기를 두 시간 동안 달래다 보면 아기 울음소리가 짜증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 나의 육아 여정에도 고비는 꾸준히 찾아왔지만 돌아보면 아기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한 적은 별로 없었다. 홧김에라도 분을 내거나 짜증을 낸 적도 없다. 아기가 이유 없이 울면서 칭얼거려도 내 감정에는 큰 영향이 없다. 내가 너그러운 성품을 가져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본래 나는 쉽게 옹졸해지고 불평도 잦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아기 앞에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육아와 가사에서 자기 몫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가 양육에 함께했기에 나는 어느 정도의 여유를 늘 갖게 되었다. 출산 후에도 나의 일을 가지면서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던 까닭 역시 그러하다. 내가 일을 하는 동안 남편은 육아를 전담했고, 그 시간만큼 나는 자연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쌓인 마음의 여유가 감정을 조절할 힘을 주었다. 남편을 향해서도 변함없는 애정과 의리를 갖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큼 좋은 가정교육이 없다고 한다. ‘아빠 육아’의 마법은 아마 이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아빠만이 가지는 고유한 장점도 존재할 것이다. 엄마와 상호 보완되는 좋은 부분들도 많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을 발휘할 시간과 기회가 더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양육의 주체로서 육아에 뛰어드는 아빠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글에서 참고한 다큐멘터리 링크 첨부합니다.
부부가 함께 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tvN 스페셜 <아빠의 임신> 3화

https://youtu.be/P502CnSnAyM



EBS 다큐프라임 <아버지의 성> 2부 - 아빠의 역습


https://youtu.be/BC9SkAQ72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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