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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Feb 06. 2018

엄마가 되어도 될까

엄마 되기, 선택의 문제




임신 기간의 목표가 있다면 순산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순산을 위해 임신 8개월까지 요가를 했고, 저녁마다 30분씩 걷기와 더불어 짐볼 운동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출산 후기들을 읽으며 아침을 맞이한 까닭도 그러했다. 출산은 내 생애 가장 큰일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하고 싶었다. 그리고 출산 당일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여러모로 알아보면서 각각의 상황에 따라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자주 곱씹었다.



학생 때 캠프에 놀러 가면 누군가가 자고 있는 내 얼굴에 낙서하는 게 끔찍하도록 싫었다. 더 어릴 때는 발표회나 어떤 무대에 오르기 위해 분장을 하기도 했는데, 꾸미는 걸 좋아하는 아이도 있겠지만 나는 그 느낌이 이상하리만큼 불쾌했다. 타인이 완력으로 내 신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 느낌은 항상 불편하다. 신체적 폭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가벼운 위해라고 해도 스스로 방어하기 어렵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일 때 오는 긴장과 불쾌감, 무력감이 나는 유난히 싫었다.



그래서 출산을 앞두고 상황을 미리 그려보며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임신도 그렇긴 했지만, 출산을 하면 내 몸은 공유화되고 평생 은밀히 감춰온 생식기는 낯선 이들(의료진)에게 공개되고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집어넣는다. 태아는 강력한 의지로 내 몸을 뚫고 나온다. 결코 당해본 적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출산 당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숙지해야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 같았다. 출산 자체는 예상보다 더 엄청난 일이었지만, 미리 생각해두지 않았다면 아마 더 큰 충격과 당혹감을 겪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토록 열심히 준비한 덕분인지 나는 비교적 큰 문제없이 출산을 했다. 목표를 이룬 셈이다.

하지만 그 후에야 깨달았다.
‘나는 오로지 출산만 준비했구나!’
그동안 순산에 목을 매느라 육아에 대한 준비는 소홀했던 것이다. 언니와 함께 살면서 조카들을 키워봤으니 어느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 어른들의 말처럼 닥치면 다 하게 되는 줄 알았던 걸까. 험한 분만 과정을 씩씩하게 이겨내고 ‘순산’이라는 목표를 이뤘으나 육아의 큰 산 앞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사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나는 눈앞의 목표만 보았다.



밖에서 보이는 아기들은 대부분 아장아장 걷거나 아기 띠에 달려 있다. ‘아기’를 생각하면 젖꼭지를 물고 앉아 있다거나 히죽히죽 웃으며 기어 다니는 아기의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출산 후 내 품에 안긴 아기는 너무 작고 붉었으며 자의식이 거의 없어 보였다. 나의 딸은 난 지 사흘 만에 눈을 떴는데 사실 뜬 것도 감은 것도 아닌 게슴츠레한 눈빛에 가까웠다. 매일 고치처럼 속싸개에 싸여 누워만 있는 아기를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데 언제 크지?’



상상 속 아기들처럼 앉고 기어 다니려면 최소 반년은 훌쩍 지나야 한다는 걸 나는 몰랐다. 요즘은 텔레비전에서 아기들의 생활을 담은 예능 방송이 많아졌지만, 신생아 양육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 것 같다. 목도 허리도 가누지 못하는 작디작은 아기를  매일 목욕시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겪어보지 않았다면 알 방법이 없다. 내가 어떤 소리나 표정으로 얼러도 반응이 없는 아기와 단둘이 보내는 하루는 생각보다 훨씬 막막하고 외로웠다.



흔히 말하는 ‘보편적인 삶’의 과업 중에서 ‘부모 되기’만큼 큰 준비 없이 맞이 하는 일이 있을까. 취업을 할 때 나의 꿈과 적성, 일의 전망을 고려하며 몇 년 동안 준비하는 것처럼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 역시 미리 준비해야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부모가 되는 일은 당연한 의무로 요구받을 뿐, 이것이 선택 가능하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는다. 가까운 가족부터 오늘 처음 만난 사람까지도 나에게 결혼 여부와 자녀 계획을 안부처럼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라서 그럴 것이다.



더욱이 이 사회는 여성을 미래의 엄마로 간주하고 ‘좋은 엄마’를 여성의 삶의 이상이나 목표로서 제시한다. 신체에 자궁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언젠가는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이다. 자궁은 내 몸의 일부지만 때로는 공공의 영역 같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상대방에게 맹장 수술을 강요하거나 상대방이 먼저 말하기도 전에 전립선 건강을 염려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만약 어느 친척이 ‘네가 젊으니 가족을 위해 장기 기증을 하라’고 강요한다면 온당하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개인의 신체는 당사자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성에게는 가정과 국가를 위해 출산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전해진다. 심지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기르는 것만이 여자의 행복인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임신과 출산을 겪고 나서 이러한 메시지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불합리한지 비로소 깨달았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을 망가뜨린다는 점에서도 중대하지만 여성의 삶에도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주기 때문에 충분한 고려가 필요하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출산과 육아에 대해 고민했으면 좋겠다. 고민하는 사람은 여러 상황과 현실을 견주고 사유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임신을 결정했다면 더욱 잘 준비할 수 있다. 아기를 낳는다고 할 때 장차 어떤 일이 펼쳐질지 이왕이면 구체적으로 알아 두는 것이 좋다. 엄마들의 서사에 귀 기울여도 괜찮다. 이런 식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면 무작정 임신하고 맞닥뜨리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임신과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되기 쉬운 한국 사회의 부당함에 목소리를 높이며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도 있다. 그리고 신중하게 선택한 후 그 결과를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을 ‘아무것도 모를 때 얼른 해버려야 한다’고 정의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너무 많이 재거나 계산하지 말라는 뜻인데, 결혼을 하고 나니 이 정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겠다. 아무것도 모를 때 결혼을 결정하는 것은 도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결혼에 대해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아무것도 모를 때’ 결혼하지 않았을까. 인간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각자에게 맞는 방법으로 확신을 얻을 것이다.



몇 번의 연애와 소개, 여러 사건과 고민 끝에 내가 그린 이상형이 있었다. 이성과 감성이 균형 잡힌 사람, 똑똑하지만 겸손한 사람, 성찰과 사유가 가능하고 변화의 동력이 있는 사람.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면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혹자는 진지하게 ‘그런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 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확신을 얻는 방법이었고, 감사하게도 가까운 곳에서 그런 사람을 찾았다. 그럼에도 부딪치고 깎이는 시간은 찾아오지만 이런 기준 없이 적당한 사람과 덜컥 결혼했다면 나는 더욱 숱한 위기를 겪었을 것이다.



출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내게서 자생되기 어려운 맑고 환한 즐거움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출산을 권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이게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 육아는 몇 마디 말로 쉽게 권할 사안이 아니다. 나의 딸에게도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하도록 할 것이다. 어차피 아이를 낳을 거라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임신하라고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길게 보면서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출산을 선택하지 않아도 다른 모양으로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자녀를 낳아 기르는 삶을 선택했다. 그러니 이 선택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어린이들은 대체로 귀엽고, 조카들도 사랑스러웠지만 딸은 또 새로운 차원의 사랑이다. 내 몸속에서 자란 생명이 탄생하여 산고와 육아의 고단함도 잠시 잊게 만드는 얼굴을 보여준다. 온통 무너지고 싶은 날에도 한 번 더 몸을 일으킬 힘을 주며, 성장하는 모습 하나하나가 어떤 엔터테인먼트보다 흥미롭고, 아이가 자랄수록 웃을 일이 더 많아진다. 이 글을 쓰는 요즘, 아기는 내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누구랑 통화라도 하듯 중얼거린다. 신발을 가져와서 신겨달라고 하고 책을 읽어달라는 의사를 강력히 표시한다. 전보다 훨씬 자주 웃고 고집도 생겼다. 성장의 증거를 매일 보여주면서 본인도 행복해한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탄식한다.

“와, 너무 귀여워.......”
“좀 심하다. 귀여움이 너무 심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부부도 숨 쉴 틈이 더 생겼다. 아이가 자라면 늘 새로운 과업을 내려받는 기분이 들지만, 그럼에도 아이와 공유하는 일상이 익숙해졌고 이 속에서 나의 일과 소망을 실현하려 노력하고 있다. 나는 아이를 낳고 내 원가족이나 배우자로 선택한 사람 말고도 세상에서 가장 빛나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더 얻었다. 그리고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으로 노력하게 되었다. 평생 당연하게 누려온 자유를 내려놓은 채 종일 고단하게 보내지만, 이러한 즐거움과 유익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아이를 보면서 나는 운명적 사랑의 신화를 현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로지 여성에게만 육아와 가사의 모든 책임을 지게 하는 문화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 가부장제를 버리고 더 평등한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회에서 높은 출산율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여전히 이 사회는 아이 가진 엄마에게 날이 서 있다는 걸 느낀다. 한국에서 여성은 대체로 출산 후에도 자기 일을 이어가기 쉽지 않으며 어떤 이들은 엄마에게 일을 중단하라고 요구한다. 자아실현의 욕망은 꺾이고 자녀에게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지지만 그러면 ‘자기 자식만 아는 맹목적인 모성’이라 비난을 받는다. 반대를 무릅쓰고 커리어를 쌓아간다 해도 그 과정은 혹독하다. 자녀가 있는 기혼 남성이라면 받지 않을 반응과 눈빛, 평가, 부정적 메시지를 이겨내고 균형을 찾아가야 한다. 그 몫도 오롯이 엄마에게 주어진다. 이럴 때는 또 ‘이기적인 엄마’ ‘무책임한 엄마’로 비난을 받기도 하고 엄마 스스로도 자주 자책한다.



자녀 성적과 입시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엄마, 혹은 아이를 방치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가려진 저들의 이야기를 상상한다. 비도덕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어떤 모습이 비치기까지 그들은 무엇으로 하루를 채우며 살았을지 서사로 그려진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에 다 동의할 수는 없어도 이해는 된다. 한국이 아이 키우는 사람과 비양육자를 동등하게 대하고 육아의 큰 짐을 부부와 사회가 나누어 지며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곳이었다면 불행한 부모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그렇게 바라는, 다음 세대를 책임질 아이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아이 낳기를 선택하지 않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어느 누가 아무런 보상이나 도움 없이 자유를 포기하고 몸을 망가뜨려가면서 24시간 근무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배려나 제도 없이 날 선 비난만 들리는 사회에서 엄청난 시간과 경제 비용까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그럼에도 이 바보 같은 일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들은 더 인정받고 행복해져야 마땅하다.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해도 된다고 누군가 말해줬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래도 나는 엄마 되기를 결정했을까? 운명론자답게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는 전제로 답해보자면, 나는 기꺼이 결혼과 출산을 택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부모 됨에 대해 더 고민하며 공부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등 떠밀려 출산과 육아의 낯설고 장엄한 세계에 휩쓸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임신과 출산 이후 여성의 신체 안팎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엄마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기쁨과 괴로움, 불합리와 불편의 면면들이 편견 없이 읽혀야 한다. 고민하며 주저하기도 하고, 출산이든 비출산이든 신중하게 결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사회 제도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출산이 모든 여성이나 부부에게 당연히 요구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면 비로소 ‘함께 짊어지자’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남들이 별 이유 없이 ‘그냥 하라’고 하는 일은 최소 한 번은 의심해 봐야 한다. 그것이 일생에 영향을 주는 결정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은 합리성만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자녀는 인생의 족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엄마들이 양육 스트레스를 호소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은 아이 낳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험하고 몸이 곤해도, 시간과 자유를 잃는다 해도 아이의 환한 얼굴을 볼 때면 합리성 같은 것은 까마득 잊어버린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것을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로 여기기도 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일이 힘든 순간도 있지만 사실 부모 역시 아이에게서 크고 영롱한 사랑을 받는다. 나의 딸도 의아할 정도로 엄마를 사랑한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도 늘 마음에 못 미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아이는 사랑을 주면서 조금도 계산하지 않는다. 출산이 비합리적인 선택이라 해도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자녀가 구원이 되고 성장의 동력도 되는 게 아닐까. 



고민 끝에 임신을 결정할 수도 있고, 나처럼 그저 때가 되어 마음이 열렸을 수도 있다. 출산이든 육아든 준비하며 대처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결국은 어느 순간 아이를 보며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낳길 잘했어.'



출산과 비출산,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정을 긍정하며 주체적으로 행복의 색깔을 찾아가는 여성과 부부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이로써 15회에 걸친 위클리매거진 연재를 마칩니다.

마지막이니 편하게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어요.


매거진 '내가 엄마가 되어도 될까'는 동명의 책 원고 중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글 하단의 '이 작가의 책'에 나오는 그 책 맞습니다.)

브런치에 공개한 분량 외에도 남편 인터뷰 등 다양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남아있습니다. 혹시 아쉬움이 남으셨다면 책에서 다시 이야기 나누면 좋겠습니다. (중요!)


가끔 이 책의 리뷰를 찾아보곤 합니다. 저는 미혼 여성이나 임신을 고민하는 분들을 생각하며 원고를 썼는데, 저보다 훨씬 오래 아이를 키워오신 분들도 함께 공감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책 자체가 임신부터 첫돌까지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어서 임신부 분들도 많이 보시는 것 같아요. (임신 선물로도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흐뭇하게 하는, 또 가장 자주 보이는 리뷰는 "출산 전에 남편과 함께 읽어야 할 책"이었어요. 부부라면 임신-출산-육아의 지난한 과정을 함께 짊어지고 고민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과정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함께 알아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하지요. 


매거진 연재중에 남겨주신 댓글도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댓글에 답글을 남기는 걸 목표로 했는데 역부족이네요. 그렇지만 댓글 알림을 볼 때마다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글의 내용에 따라 독자분들끼리 의견 나누시는 모습도 진지하게 지켜보았습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다음 글 연재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내가 엄마가 되어도 될까>를 쓸 때부터 자주 생각해온 주제입니다. '과연 평등한 부부 관계가 가능할까?' 많이 고민했던 만큼 실제로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남편과 아내가 동등한 존재라는 건 누구나 알지만 실제로 가정의 모든 일에 동등해지는 건 피차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희도 계속 배워가는 중이기 때문에 그 과정의 에피소드를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저희는 계속 실험하고 있어요. 거기서 유의미한 지점을 찾아 글로 옮기려고 해요. 

다음 글에서도 다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글로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는 건 언제라도 행복한 일이에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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