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결혼 이야기"
영화 "결혼 이야기"는 이혼조정 중에 있는 예비 이혼 부부, 찰리와 니콜의 이야기이다. 서로 사랑했던 두 남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혼에 이르게 되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찰리는 니콜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녀가 얼마나 에너지가 많고 긍정적이며 즐거운 사람인지 이야기한다.
"니콜은 시시때때로 마시지도 않을 차를 우린다"
이 말은 찰리가 니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스쳐 지나듯 흘린 내용이다. 니콜이 왜 차를 우려 놓고 마시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집 안 곳곳에 덩그러니 놓인 니콜의 찻 잔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왜 니콜은 마시지도 않을 차를 우렸을까? 둘러보니 우리집에도 여기저기 내가 마시다 놓아둔 찻 잔들이 있다. 나에게 있어 차를 마시는 시간은 흘러가는 일상을 잠시 멈춰 세워 숨을 고르는 순간이었다. 주변뿐만 아니라 내 생각을 잠시 환기하고 나를 향해 돌진하는 일상에 내가 떠밀려 가지 않게 시간의 틈을 만든다. 아주 가끔, 나도 차를 우려 놓고 다른 일을 하느라 잊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렸다. 이미 식어버린 차는 도리가 없었으므로...... 그런 이들이 니콜에게는 일상이었나 보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그런 시간
그녀는 그녀가 나고 자란 LA를 떠나 뉴욕으로 왔다. 자신이 성장한 고향과 가족을 떠나 완전히 낯선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는 건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가 성인으로서 독립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니콜의 삶은 찰리의 삶으로의 편입이었다. 니콜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녀의 삶의 터전을 내던질 만큼 용감했지만 새로운 곳에서 흔들림 없는 자신의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 나는 꿈처럼 아름다운 창 밖의 설경이 보이는 창 가에 남겨진 니콜의 찻 잔을 보며 뉴욕의 찬란한 아름다움 속에 소외된 그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을 보았다. 그 찻잔에 담긴 니콜의 모습은 자신의 열정을 쏟아내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는 쓸쓸함 같은 것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아픔을 알지 못했고 그녀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체 시간은 흘렀다. 만약 니콜의 다리가 부러졌거나 머리가 깨졌다면 찰리는 니콜을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했을 것이다. 니콜도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마음이 아플 때는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하루 세 번 꼭 양치질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마음이 상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니콜이 시시때때로 마시지도 않을 차를 우린다고 생각한 찰리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니콜은 마시지 않을 차를 우린 것이 아니라 우려 놓은 차를 마시지 못한 것이다. 니콜이 LA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대학원에 재학 중에 회사에 입사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논문을 썼고 그리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이 이어졌다. 친정부모님과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첫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했고 일주일에 한 번 학교에 강의도 나갔다. 둘째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건 같이 놀 수 있는 형제가 있어야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말도 안 되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둘째가 태어나자 일을 하며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남편은 늘 내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협조적이었지만 육아에 대한 책임감을 더 무겁게 느낀 건 나였다. 출산과 동시에 일은 그야말로 근근이 버텨나가는 것이었다. 둘째가 4살이 되었을 때 캐나다로 이민을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4년 후에 다시 귀국을 하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척 마음이 황망한 상태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 없이 떠났기 때문에 다시 돌아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나에게 디자이너라는 정체성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책상 서랍 안에 아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옐로 페이퍼는 더 이상 내가 디자이너가 아니라는 사실을 오히려 일깨워 주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 큰 애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선배 언니와 동업을 고민하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 언젠가 같이 스튜디오를 하자고 버릇처럼 이야기했었던 우리였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데 다시 일을 시작해도 될까?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 일을 시작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움직이기로 했다. 잃어버린 내 자리는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거실의 테이블 위에 그리고 아이방의 책장 틈에 놓여 있는 니콜의 찻 잔을 보면서 나는 아내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최선을 다한 니콜의 모습을 보았다. 니콜은 찰리와 아들 헨리의 머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머리도 스스로 잘랐고(어쩌면 그건 그녀에게 커다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피곤하고 지친 하루를 보냈어도 자기 전에 아이를 위해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아주 작은 소품부터 잡다한 모든 물건, 집안의 모든 가구 하나하나까지도 찰리가 선택하고 들여다 놓은 찰리의 취향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니콜이 완전히 절망하게 된 건 결국 찰리의 배신이었다. 욕실이라는 가장 내밀한 공간 속, 세면대 위의 찻 잔은 더 이상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된 니콜의 모습이었다. 왜 그들의 공간에는 어디에도 마주한 두 잔의 찻 잔은 보이지 않았을까.
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것
"현대 사회는 우리가 잘살건 못살건 배웠건 못 배웠건 모두 사람으로서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사람 행세를 하고 사람대접을 받는 데 물리적인 조건들은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중에서)
니콜이 찰리에게 원했던 것은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대접이었다. 그걸 반복적으로 거절당하면서 니콜은 서서히 찰리를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건 찰리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혼조정 과정에서 조차 니콜은 그녀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찰리를 사랑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니콜이 마지막까지 지고 가야 했던 가눌 수 없는 슬픔의 무게였을 것이다. 만약 찰리가, 무심코 지난 친 니콜의 삶의 흔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다면 이들은 달라졌을까? 그랬다면 니콜의 마음을, 니콜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까? 사람으로서의 자리를 서로에게 만들어 주는 것 없이,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나의 삶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나를 대접해 주는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나로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힘이다. 그저 따뜻한 차 한잔을 만들어 내어 놓는 작은 자리가 그 작은 마음이, 사소해 보이지만 무거운 삶의 경계를 허물 수 있다는 걸 니콜의 식어버린 찻 잔이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