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노예가 되는 과정 - 부루마불, 카탄, 카후나 & 스플렌더
보드게임 할래?
“보드게임이 뭔데?”
보드게임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남자친구에게 되물었다.
연애를 할 때 매주 뭐 할까? 고민하는 것에 지쳐 있을 때쯤 남자친구(지금의 남편)가 오늘은 카페에서 보드게임을 하자고 했다. 나는 일단 뭔지 모르지만 같이 해보자고 했다.
남편이 가져온 것은 그 전설의 ’ 카탄‘(영문판)이었다. 아직도 우리 집에 가보처럼 모셔두고 있는 영문판 카탄!
난생처음 보드게임이라는 것을 했다. 한 판 하고 나서는 ’잘 모르겠는데 내 스타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남자친구도 눈치를 챘는지 바로 다음 게임을 꺼냈다. 2인용 게임으로 섬과 섬사이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섬을 차지하는 ’ 카후나‘라는 게임이다.
나는 얕은 한숨을 쉬며 “어렵고 잘 모르겠어. ”라고 짧은 감상평을 마쳤다.
남자친구는 더 이상 보드게임을 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미안하네. 저 게임들을 재미없다고 하다니 말이다.)
결혼을 하면서 이사를 하는데 남편의 짐 가운데에 세 개의 보드게임이 있었다. ‘부루마불’ , ‘카탄’, ‘카후나’이다.
미니멀을 추구하는 나였다면 벌써 버렸을 텐데 맥시멈을 추구하는 남편은 추억이 깃든 물건은 잘 버리지 않는다.
“자기야, 우리 저 보드게임 애들이 크면 다 같이 할 수 있으려나?” 남편이 말했다.
“어. 어.. 그렇겠지. 뭐..”(얼른 짐이나 정리하라는 추임새) 내가 대답했다.
아이들이 각각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이 되자 어디서 ‘부루마불’에 대해서 들었는지 우리 집 책장 맨 위 보이지도 않는 곳에 둔 부루마불을 꺼내달라고 했다. (아. 안돼. 그건 끝나지 않는 게임이라고!)
대충의 룰설명이 끝나고 아이들과 부루마불을 했다. 왜 애들은 이 게임에 열광하는가.
거의 매일 부루마불을 했다. 이제 그만을 외치고 어떤 때는 화도 냈다. 이제 그만하자고!
한 동안 우리 집안의 금기어가 된 ‘부루마불 하자’는 그렇게 봉인되어 갔다(철없는 부모의 양육태도를 이해해 달라. 연년생 아들들을 키워 보신 분만 돌을 던지시라).
어린이날 나는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해 주고자 ‘파주 출판단지 책축제’로 향했다(나의 사심이 너무 들어간 행선지였음을 밝힌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신나게 책도 사고 돌아다니다 ‘참 애들 거 사야지’
“얘들아, 고르고 싶은 거 골라!”를 외쳤다.
우리 집 둘째가 무언가를 골랐는데 그게 바로 ‘스플랜더’였다. 그냥 표지가 마음에 들어 골랐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보드게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던 때인지라 이게 무슨 게임인지도 몰랐다.
“이거 꼭 사야 돼? 다른 장난감은 관심 없어?” ( 같이 게임을 해야 되는 건데… 어쩌나)
“응, 이거 살래!!” (안 사줄 것 같으니 더 사고 싶은 아이의 심리)
우리 부부는 ‘ 스플랜더’를 배워야 했다. 유튜브도 잘 몰랐던 시절이기에 우리는 해설지를 여러 번 정독했다(설명서를 읽으면서 이거 재미있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아니 이렇게 재미있는 게임이었어?!! “
우리는 매일 스플랜더를 했다. 아이들은 본인이 지면 울기도 하고 방에 휙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게임을 중지하고 하지 않았다. 다시 하자고 해도 안 했다. 이걸 여러 번 반복했더니 그다음부터는 게임할 때 울거나 떼쓰지 않게 됐다.
우리 가족을 다시 보드게임의 세계로 인도한 게임. 마성의 ‘스플랜더’
그 후로 어렸을 때 어렵게만 느껴졌던 ’ 카탄‘과 ’ 카후나‘를 다시 가족들과 하게 됐다. 우리 부부는 알게 됐다. 우리는 이제 보드게임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얼마 전 아파트 소독이 있는 날이었다. 집집마다 소독하시는 분들이 다니시며 벌레 퇴치제를 놓아주고 가신다.
우리 집에 소독하러 오신 분이 집 안을 보더니 놀래시며
“아니, 집에 보드게임이 왜 이렇게 많이 있어요? 처음 봤어요. 그런데 보드게임 하나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최대한 말을 적게 하자. 안 그러면 이 분은 최소 30분은 나에게 잡혀 있을 확률이 높다 ‘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혹시 보드게임 처음 하시나요?”
“아니요. 할리갈리랑, 루미큐브랑 그.. 저.. 또 뭐였더라.. 같은 것만 하는 게 좀 지겨워서요”
’ 오호라, 보드게임 입문자시군‘(입문자를 만나면 신나는 편)
“누구랑 게임을 하고 싶으신가요?”(추궁하는 것 아님)
“아들이 4학년이에요. 가족이랑 같이 하려고요 “
“그럼 입문하시는 분들에게 좋을 만한 게임인데 ‘스플랜더’를 추천할게요”
책장에서 보드게임을 꺼내 보여드리니 사진도 신나게 찍어 가셨다(신은 내가 났음).
다음 소독 시간에도 우리 집 배정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번호를 물어볼까 하다가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될까 싶어 자제했다. 과연 그분은 스플랜더를 사셨을지 룰은 잘 숙지해서 게임을 해보셨을지 궁금하다. 다음번 소독 때도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