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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리 Aug 07. 2023

Epilogue

2023.08.06

2021년 12월, 태국 치앙마이 한 카페에서 왈칵 울음이 났다. 치앙마이 재즈클럽의 주인이 대륙을 횡단하는 에세이를 읽던 중이었다. 그리곤 선명히 떠오른 생각.

    “써야 해. 이제는 써야 해.”

수년을 묵혀 두었던 이야기. 우리 아이들, 마담들, 부와나들, 동네 사람들. 난생처음 느껴본 달빛의 밝음. 밤새 동화책을 편집하다 도서관 벤치에 기어가 누우면 들리던 키득대던 소리.

    “와토토, 송가 키도고.” (어린이들, 저리 좀 갈래?)

    “보배, 보배! 큭큭큭.”


케냐로 가기로 했다는 말에 모교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한텐 뭐가 남니?”

뭐가 남았을까?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분명히 안다. 마음 한구석, 기억 저 깊숙이 박혀 빛나는 무언가로 남았다. 그 후로도 이어진 온갖 고난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을 때, 희미하게 반짝이며 나를 지켜주던 그 무언가로.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나의 중심으로. 2013년 크리스마스 발표회 날의 완벽하게 충만하던 감동적인 순간. 다시 올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만큼 찬란했던 그 순간. 그런 순간들이, 너무나 감사하게도 또 왔다. 2015년 2월 다시 찾은 케냐에서, 2016년 3월 말라위에서. 그 순간들의 이야기는 차근차근 나눌 생각이다.


10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 케냐라는 말을 듣곤 황망히 전화를 끊으셨던 아버지는 이제는 전화가 닿지 않는 곳에 계신다. 언제나 든든하게 우리를 지켜줬던 분토티치 아저씨의 전화는 이제 이름도   없는 누군가가 받는다. 나는 10  케냐, 말라위, 르완다, 에티오피아, 한국, 영국, 르완다, 태국을 거쳐 다시 케냐에 산다. 그때의 나는 뜨거웠고, 지금의 나는 미지근하다. 뜨거워서 나도 데고 남들도 태웠던 그때의 내가 그리운가 하면, 그건 아니다. 천천히 낮아지는 온도와 함께 나는 나를 보호하는 방법을 배웠다. 온갖 드라마가 펼쳐지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냐면, 그것 역시 아니다. 아직은 드라마가 없는 삶이 필요하다.


며칠 전 장기하의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에세이를 읽다 마음에 들어온 구절이 있다

나는 밴드를 했던 것이 아니다. 밴드를 '믿었다'. 밴드라는 것이 가진 특별한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지금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오늘 자유로 위에서 느낀 것은 내 인생에서 믿음의 시절이 지나갔다는 데서 오는 서글픔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을 믿었다. 아니, 믿었었다. 지금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느낀 감정은 지금 내가 느끼는 서글픔과 맞닿아 있다. 내 인생에서 믿음의 시절은 지나간 것일까. 몇 달 전만 해도 그 서글픔에 내 자신에게 자꾸만 화살을 돌리려 했다.

 

이 책에 아이들, 특히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사진을 쓰고 싶지 않아 직접 그린 그림으로 대신했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작업하던 몇 달간 너무나 행복했다. 완성된 그림에 아이들을 향한 애정이 담뿍 담겨 있는 게 보인다. 아이들로 인해 조건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마음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아이들 얼굴을 들여다보고, 10년 전에 썼던 수많은 글들을 다시 읽고 다듬으면서 깨달았다. 우리가 함께 만든 그 단단한 반짝이는 무언가는 없어지지도 꺼지지도 않았다. 지치고 힘든 나를 따뜻하게 손잡아 주고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렇게 이 책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걸 천천히 인정하게 되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그때의 나를 안아주고 보듬어 주는 시간을 갖게 되어 다행이다. 뜨겁지 않더라도 따듯하고 다정한 눈으로 사람을 믿고 사랑하며 살자고 다짐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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