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에 담긴 조선시대 독자들의 현실적 욕망
한국 고전소설에 등장하는 효자와 효녀의 지극한 마음,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을 그 시대의 독자의 마음을 살펴보기 위해 ‘효라는 것은 그 시대에 무엇이었을까’를 앞 글‘바다에 뛰어든 심청, 그녀를 이해하기 위하여(1)’에서 먼저 살펴보았었다.
<심청전>을 재밌게 읽은 그 시대 독자들에게 당시 효의 의미는 두 갈래였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효는 인간 본성 중 가장 중요한 어진 마음[仁]의 실현으로서, 개인 수양의 핵심이며 집안과 나라를 다스리는 핵심 원리였다. 이는 효가 가진 이상적 의미이다.
한편으로, 조선왕조는 유교 이념에 걸맞은 통치 질서를 구현하고 풍속의 교화를 이루고자, 효자를 끊임없이 발굴하고 그들이 태어난 곳에 기념비와 기념문을 세워주며 폭넓은 혜택을 주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효를 통하여 통치 질서를 구현하고자 하였고, 개인은 가문의 명예와 위세 유지, 신분 상승이나 부역 면제 등의 여러 혜택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당대 효가 가진 현실적·기능적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효의 현실적, 기능적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한 바를 써보려 한다.
사실, 효가 경전 상의 이상적 지향점으로 존재한다면 현실에서 영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이상만을 위해서 살지 않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의 욕망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의 효율적 전파와 통치 질서 구축을 위해 효를 장려하였지만, 이와 관련된 갖가지 혜택을 주었다. 따라서 개인은 효행을 공인받아 가문과 개인의 위상을 드높이기도 했다.
효는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향약에서 제일의 규범으로 꼽히며 향촌사회의 풍속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효를 중심으로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그 풍속을 유지하려 한 지배계층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의해 같은 공동체 내의 촌민들 또한 서로를 평가하는 데 있어 효를 중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국가의 적극적인 효 장려 정책이 있었다. 조선왕조는 풍속교화를 위해 충, 효, 열의 행적이 있는 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현실적인 혜택과 상을 주었다. 효자에게 명예와 물질적 혜택을 함께 줌으로써 제도적으로 효를 권장한 것이다. 태조 원년에 방침을 밝히고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 조까지 이를 유지했다. 포상을 받은 사람들은 유교 윤리에 친숙한 삶을 살아가는 선비와 양반들이 많았지만, 점차 평민과 천민으로 확산되는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가슴아픈 건 효행의 실천 양상 또한 충격적으로 변해갔다는 점이다. 고려나 조선전기 이전에 비해 조선후기에는 단순하게 유교적인 의례를 실천하는 사례보다 격렬하게 신체의 일부 또는 목숨을 내걸고 부모의 안전을 지키는 효행 사례가 많아진다
열녀로 인정받는 사례 또한 이와 비슷한 양상을 띠어 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시대까지는 수절 혹은 먼저 간 남편의 제사 및 삼년상을 극진히 치룬 사례가 대다수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왕조에 들어 자발적인 자해를 시도하는 열녀 비중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조선 전기에 17.5%였던 사례에서 후기에는 50.3%로 늘어났으며, 3.5%에 해당하는 18인만이 단지, 할고와 같은 소극적 자해 행위를 했고, 96.5%의 해당하는 502명이 자살을 선택했다.
이는 단순한 효와 열의 실천으로는 공인 받기 힘들어져갔으며, 효자로 인정받기 위한 행동이 다소 경쟁적인 양상을 띠어갔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실제 17세기에 문벌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면서, 가문이 문벌이 되기 위해서는 선조 중에 충절, 효열자 등을 가졌다는 사실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효행에 대해 국가의 인정을 받는 것이 가문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는 물론 물질적 보상과도 관계되는 양상이 강해지자, 이를 이용하는 사례도 증가했다. 실제 여러 양반가들이 자신의 선조를 ’국가에서 인정하는 효자‘로 만들고자 오랜 세월에 걸쳐서 노력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듯 효자가 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인이 효행을 이행하는 것 이상의 여러 절차가 필요했다.
양반가의 효행 청원에 관한 여러 실례를 살펴보면, 최초 청원으로부터 71년에서 길게는 백여 년이 넘게 걸린 것으로 나타난다. 진주 하진태의 효행포상 청원은 1791년 시작되어 정려는 100년 후인 1892년에 건립되었다. 고성 진양정씨의 경우 1827년 상서부터 약 71년간 계속되었다. 합천 전주 전씨 가문의 경우 삼대에 걸친 효행과 학행, 충절에 대한 복합적 청원을 시도하여 약 87년 걸렸다.
또한 효행 청원이 증가하면서 그 사실의 증명이 필요하여 지역 여론과 주민들이 청원에 대거 합세하기도 했다. 효자 공인과 포상을 받기 위해 지역 공론이 대규모로 형성되는 것이 유리했던 것이다. 실제 청원과정에서 청원문서를 작성하고 제출하는 주체는 후손이나 가족보다 효자 집안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지역주민 혹은 지역 유지가 되기도 했다. 공식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양반들의 효행 청원 과정이 치밀하고 끈기 있게 이루어졌으며, 이를 위해 광범위한 여론 형성 및 양반들끼리의 협력도 이루어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여러 정황들은 당대 효가 지닌 기능적 의미로, 국가는 ‘통치 질서를 구축하는 방도’였으며 개인에게는 ‘제도적 공인을 통한 개인 욕망 실현의 방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소설에서 표현된 인물의 효행 또한 이와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효행이 평범한 의례를 행하는 것을 넘어서 죽음을 불사한 비범한 행위로 묘사되며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또한 인물들의 효행이 인정받는 과정에서 여러 방면으로 지지 세력을 형성하거나 효행에 대한 평판 등을 묘사하여 사건 전개에 개연성을 부여할 가능성이 있다. 효행의 결과로서 복이나 성취 또한 당대에 독자들이 품었던 욕망과 밀접할 것이라 예상된다.
결국 <심청전>과 같은 소설은 이러한 효가 가진 복합적 의미를 잘 구현해 냄으로써, 당대 독자의 욕망과 기대에 부합하며 폭넓은 인기를 끈 것으로 보인다.
* 관련 참고문헌:
-박주(1998), 「조선시대 효자에 대한 정표정책」, 한국사상사학 제10권 1호, 한국사상사학회, 291~311면.
-손숙경(2015), 「조선후기 언양 향반 가문의 사회 지위 유지와 그 양상: 삼동면 보은리 단양 우씨 가문의 사례연구」, 석당논총 62집,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21~254면.
-이정주(2007), 「전국 지리지를 통해 본 조선시대 충효열 윤리의 확산 양상」, 한국사상사학 제28집, 한국사상사학회, 293~324면.
-채휘균(2015), 「조선시대 효자열망에 내재된 욕구 분석: 18~19세기 경남지역 효자청원문서를 중심으로」, 국학연구 28, 한국국학진흥원, 93~1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