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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 May 03. 2024

우월함이 결정짓지 않는 것

영화 <가타카>


여기저기서 '우월한 유전자'라는 단어를 참 많이 마주칩니다. 부모 자식이 모두 빼어난 미인이거나, 명문대가 집안 내력인 사람들을 소개할 때 어김없이 따라붙는 수식어죠. <가타카>가 그리는 미래는 이 우월한 유전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입니다. 부모의 난자와 정자를 인공 수정한 뒤, 유전자 속의 결함 인자를 말끔히 제거해 출산하거든요. 이렇다 보니 모든 평가 역시 유전자만으로 이루어집니다. 자소서와 면접을 볼 필요가 없어요. 피 한 방울이면 그 사람이 걸리게 될 질병과 폭력성 등의 성향까지 알 수 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빈센트는 오로지 사랑으로 자연 잉태된 아이였습니다. 심장병으로 30세에 요절할 확률이 99%인 열등 인자죠. 세상의 모든 이들은 그를 이미 답이 나온 문제처럼 바라봤지만, 그는 자신이 여전히 새로운 답을 써 내려갈 여지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주 비행사가 되어 별들 사이를 유영하는 게 그의 꿈이죠. 하지만 우주 비행사는 누구보다 최상의 유전자가 요구되는 직업입니다. 심장이 터질 때까지 체력을 단련하고, 천체에 대한 책을 달달 외워도 그가 비행기에 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청소부가 되는 것뿐이에요.


결국 빈센트는 신분 위장 브로커를 찾습니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지만,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된 과거 수영 은메달리스트 제롬의 이름을 빌리기로 해요. 외모를 제롬과 최대한 비슷해 보이게 꾸미고, 제롬이 그를 위해 준비해 둔 피와 오줌으로 생체 인증 시스템을 속입니다. 대신 아침에 일어나면 몸에 난 체모를 싹싹 긁어내며, 빈센트라는 부적격자의 흔적이 세상에 남지 않도록 자신을 지워내요. 살얼음판을 걷듯 불안한 일상이지만, 발사되는 우주선을 보고 있으면 다시 마음이 부풀어 오르죠.


그러던 어느 날, 빈센트의 정체를 의심하던 발사 감독관이 죽임을 당합니다.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면서 집요한 형사의 손에 빈센트의 속눈썹이 들어오고 마는데요. 이렇게 정체가 들통나버리는 걸까요? 아니, 그보다 먼저,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다음 비행의 주역으로 촉망받던 남자는 '적격'으로 타고난 제롬일까요, '부적격'으로 태어나 의지로 그 모든 역량을 쌓아 올린 빈센트일까요?  



타고났다는 것은 노력하는 것보다 우아해보입니다. 죽어라 발버둥 치지 않아도 이미 저만치 앞서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모습에 너무 많은 의미와 경외를 부여한다면, 느리지만 단단하게 자랄 수 있던 어떤 가능성에 너무 빨리 선을 그어버리게 될지도 몰라요. 유전자 교정을 통해 태어난 안톤은, 자신보다 열등한 유전자를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자꾸 이기는 형 빈센트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지?" 빈센트는 이렇게 대답해요. "난 돌아올 힘을 아껴두지 않거든." 


영화의 제목 '가타카 GATTACA'는 DNA의 염기 서열인 G(구아닌), A(아데닌), T(티민), C(시토신)의 앞 글자를 조합해 만든 단어라고 합니다. 우리 몸에 새겨진 지도는 강력하죠. 그럼에도 그 지도가 모든 길을 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이 좋습니다. 제가 오늘 노가리 레터에서 고른 <가타카> 포스터는 이탈리아 판인데요. 하단에 이렇게 쓰여있어요. 'non esiste gene per lo spirito umano.' 인간의 정신에는 유전자가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장 명징하게 깨달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빈센트가 아니라 그에게 우월한 유전자라는 자격을 빌려준 제롬입니다. 유전자라는 중력에서 벗어나 마음껏 날아오르고자 했던 빈센트를 보며, 제롬은 최상의 유전자에도 불구하고 은메달밖에 따지 못했다는 자기 비하로부터 벗어나기로 마음먹습니다. 서로의 안티테제로 만나 운명 공동체가 된 두 사람의 서사가 깊은 여운을 주니, 5월에는 꼭 <가타카>를 만나 보시길 바랍니다.





2주에 한번, 네 명의 에디터가 콘텐츠에 대해 노가리를 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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