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약품

결국 무거운 약가방을 열어보지도 못했음을 감사합니다

by 이은경

여행을 앞두고 많은 잔소리들에 둘러싸이긴 했지만 최고의 잔소리는

<약 잘 챙겨가라>였다. 옳으신 말씀.


캄보디아에서 단단히 물갈이를 하느라 앙코르와트 사원을 눈앞에 두고도 발을 돌려야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절레절레 끔찍했다. 마땅한 지사제 없이 쏟아지는 설사를 견디는 건 지옥이었다. 그런 일은 또 얼마든 일어날 수 있고 나보다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러리라. 그래서 비상약품을 챙겼는데, 내가 안 챙기고 남편이 챙긴 덕분에 비상약품이 아니라 응급실이 되었다. 오 마이갓


타고난 꼼꼼함과 걱정많은 성격, 단단한 준비태세는 비상약품 가방의 배를 점점 더 불러오게 만들었고, 한 번도 사용해본 적도 없는 종류의 약까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밴드의 종류만도 엄청났고, 뿌리는 메디폼에 붙이는 메디폼, 먹는 해열제에 넣는 해열제, 성인 지사제와 아이들용 지사제.. 평소 가정에서 필요한 약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 줄도 이번에 알았다.


물론 여행 중이라는 특별함 탓이었다. 한국에서야 크게 다치거나 약이 말을 듣지 않으면 병원이 있지만 여행 중 병원이라니. 교통 사고 아니고서는 약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챙겨간 것이긴 하지만, 슬슬 이 약가방의 덩치가 부담스러워졌다. 환자들의 여행도 아닌데 이렇게나 많은 약은 뭐하러 다 싸들고 온거야. 슬슬 남편에 대한 불만이 생겨났다. 여행 중 우리의 짐이 점점 늘어나게 된 건 남편이 사들인 옷들 탓이 컸으므로 겸사겸사 원망했다. 너의 약욕심과 너의 옷욕심이 캐리어 지퍼를 고장나게 할지도 모르겠다. 이 철없는 남편아.


결과는.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는 딱 한 번 약가방을 열었고, 대일 밴드 한 장을 꺼내고는 다시는 그 가방을 열어볼 일이 없었다. 무겁고 덩치 큰 그 가방을 다시 캐리어에 쑤셔넣고 돌아오자니 그제야 간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많이 챙길 필요는 없었는데. 과했어, 과했어. 어차피 쓸 일도 없었잖아.


약을 쓸 일이 없었다는게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 상황인지 모르고 여행 끝나간다고 이내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참 가벼워 보였다.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진짜 이것밖에 안되더라. 약을 쓸 수 밖에 없는, 약으로도 어찌 안되는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이 없었다는게 여행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었는데 어느 새 감사는 사라지고 캐리어 좁다며 투덜거렸다. 혼나야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