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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Jan 13. 2019

머리카락은 못 본 거다

굳이 그걸 꺼내어 들고 사장님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토요일 저녁, 이런저런 일들로 늦어진 끼니를 해결하러 눈에 띄는 아무 식당에 들어섰다. 고기 종류면 되겠다 싶어 보쌈집을 골랐는데 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기분처럼 식당의 분위기도 딱 그랬다. 나쁘지 않은 음식을 먹고 고픈 배를 달래고 늦지 않게 돌아가고 싶었다. 아주 가끔 식당에서 혹은 어느 장소에서든 원치 않는 해프닝으로 기분을 심하게 상하는 경우가 생기는 게 우리네 일상이기 때문에 그런 일만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주인으로 보이는 내 또래의 남자분이 서빙을 시작했다. 난 그의 걸음걸이가 퍽이나 맘에 들었다. 식당 안은 주말의 저녁 시간이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손님이 드물고 한적한 분위기였는데 그래서일까 그의 종종대는 걸음걸이는 더욱 눈에 띄었다. 연애 시절처럼 서로만 뚫어져라 바라볼 나이도 분위기도 아닌 우리 부부는 약속이나 한 듯 그의 재고 날렵한 걸음걸이, 우리의 고픈 배를 의식한 듯한 빠른 몸짓과 손동작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밝고 경쾌한 음성과 호의적인 편안한 미소까지. 기대없이 들어간 식당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편안함을 느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고소하고 적당히 익혀 나온 고기와 아삭하게 무쳐놓은 무말랭이 덕분이라는 건 부인하지 않겠다. 맛있는 음식과 오랜만에 놀러온 친구네 가족을 대접하는 듯한 주인의 환대 속에 식사는 점점 더 만족스러워지던 참이었다.


내 앞 쪽에 가까이 있던 양배추 샐러드 드레싱이 상큼해 연신 집어먹던 내 눈에 들어온 건 짧고 단단하고 새까만 머리카락. 분명하게도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 한 가닥이었다. 하얗게 예쁘게 채 썰어진 양배추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어버린 검은 머리카락.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다. 1초 정도가 필요했다, 내겐. 머리카락은 발견되었고 내겐 선택권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갑자기 갑이 된 기분에 으쓱해졌다. 갑이니까 갑질을 해도 되고, 갑이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1초의 고민 끝에 머리카락을 스윽 숨겼다. 행여나 함께 먹던 가족들의 눈에 띄게 만들어 복잡해지고 싶지 않았다. 샐러드 접시 아래로 모습을 감춘 머리카락은 그대로 헤어졌다. 잘 한 건지는 지금도 정말 모르겠다. 머리카락과 함께 무쳐졌을 샐러드 한 접시를 끝까지 다 먹은 나는 머리카락 때문에 지저분해졌을 양배추를 보며 말도 안되는 우리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다. 못 본 걸로 할테니 꾹 참고 잘 넘어간 나를 봐서라도 이 음식 먹고 있는 우리 가족들 한 명도 조금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바램 덕분일까, 머리카락 덕분일까. 조금 갸웃하던 가족들의 증상들이 하나씩 자리를 찾고 균형을 잡고 안정되어 가는 건 기분 탓일까 머리카락 탓일까. 

어쨌든 머리카락은 못 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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