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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Jan 13. 2019

당신이 잠든 사이에

수면 내시경과 비수면 내시경, 그 당연한 선택을 하며

꼭 그러겠다고 다짐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수면 내시경이 그 중 하나인데 언젠가 내시경 검사를 받아야 한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수면 쪽을 택하리라는 결심은 십 년이 넘었다. 언젠가 내시경을 받아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 지는 오 년 쯤. 드디어 때가 왔다. 불쑥 예약을 해 놓았더니 친절하게도 집으로 관장약을 배달해준다. 이게 그거구나. 꼬박 24시간 동안 금식을 하며 어마어마한 양의 액체를 마셨다. 마셨다기보다 들이부었다는 표현이 딱 맞았고, 그의 결과로 똥을 누었다기보다는 똥이 흘러나왔다는 표현이 딱 맞는 밤을 보냈다. 밤새 화장실을 오가는 번거로움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잦은 대변 후 휴지로 뒤를 닦는 일은 결국 항문을 짓무르게 만들었다. 비데를 쓰던가 화장실 휴지를 조금 더 부드러운 재질로 썼어야 했구나라는 후회는 늦었다. 확인하진 못했지만 이미 벌겋게 헐어버린 항문을 맡긴 채 대장 내시경을 위한 수면을 청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고픈 배를 달래가며 두 시간여의 검사들을 마치고 마지막 내시경실로 향했다. 올 것이 왔구나. 오늘의 종합건강검진의 꽃이자 목표이자 가장 큰 이유가 될 위와 대장 내시경을 앞둔 마음은 아주 조금 복잡했다. 내시경을 하던 중 성추행을 당했다거나 수면 마취 후 깨어나지 못했다는 등의 도대체 언제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되고 식상한 인터넷 기사가 생각났다. 괜찮다. 내겐 절대 그런 극소수의 경험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강한 믿음. 

항문으로 어떤 조치를 해내기에 가장 좋을 옆으로 누워 다리를 앞으로 모은 자세를 취했다. 벌겋게 헐어있을 항문이 신경 쓰였지만 정확히 1초만에 잠들었고 깨어났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었다. 혈액 검사 때 팔에 달아놓은 바늘로 수면제가 들어갔고 그런 줄도 모르던 나는 맥없이 수면 내시경 검사자로 분류되었을 뿐이다. 정신이 들자 궁금해졌다. 수면약에 취해 있는 동안 어떤 말을 지껄이고 어떤 진상짓을 하고 어떤 난동을 부렸을까. 위와 대장에 용종이 발견되었거나 염증 소견이 있거나 혹은 조직 검사가 필요한 어떤 증상이 있었는지에 관한 것보다 궁금했던 건 수면 마취 중의 내 모습이었다. 


“저, 별 일 없었나요?”


암환자로 분류될 가능성을 묻는 건 아니었다. 둘러싼 간호사들의 순간적인 표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지만 그랬던 그 순간도 실은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였다.  마취약에 곤히 취해 어떤 실없고 엉뚱한 소리를 해댔을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들이 호락호락 말해줄 리 없다.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죠?'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그녀들의 표정이 궁금했다. 전혀 무관심한 표정으로 일관해주길 내심 바랬지만 안타깝게도 무언가 숨기는 듯 웃음을 참는 표정을 나는 보고 말았다. 캐묻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그녀들의 엷은 웃음으로도 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동네 친한 언니가 내시경실에 근무하는데 언니가 찾아와 또 웃는다. 도대체 난 무슨 짓을 한 걸까. 언니를 졸랐다. 어떤 진상 고객으로 분류될 상황인지 적어도 나는 알아야겠다. 


여러분, 유방이 작으면 유방 초음파를 할 때 굉장히 아픕니다. 

왜 유방이 작은 사람을 위한 초음파 기계는 없는 거죠? 

저는 유방 초음파를 하느라 정말 고생했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아세요?

앞으로는 유방이 작은 사람을 위한 기계도 준비해주십시오.


이상은 내시경용 수면 마취에서 못 깨어나고 헤롱거리는 순간에도 유방이 작은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을 대신하여 병원 측에 강력히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했던 한 정신 나간 내시경 환자의 잠꼬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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