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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짧아 슬픈 기린

초단편 소설

by 밈바이러스

초원의 기린 무리
평온한 초원에, 다들 고만고만한 목 길이를 가진 기린 무리가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목을 조금 길어지게 하는 유전자 변이가 발생했고, 기다란 목 가질 운명으로 나고 자란 기린은 기나긴 목 뽐내며 다른 기린의 부러움을 샀다. 낮게 열린 잎사귀는 경쟁이 심했는데, 그는 높은 곳에 달린 맛있는 잎사귀를 쉽게 따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세대 지나지 않아, 그 기린 무리의 평균 목 길이는 그때 그 기린들의 기린아로 칭송받았던 기린보다도 길어져 있었다. 불운하게도 짧은 목 유전자를 가진 기린은 그 초원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다시 말해, 극심한 잎사귀 경쟁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몇 세대 지나, 짧은 목 유전자 기린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목이 길다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인데. 목이 특정 길이보다 길어진 기린은 더 많이 먹었고, 민첩하지 못해 사자 등 포식자에게서 도망가기 힘들었다. 또, 무엇보다, 짧은 목 기린들의 독특한 생존 전략 덕택이었다.


민수 이야기
우선, 민수와 8살 터울의 큰형은 토익 750점의 어학 점수만으로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민수도 대학을 떠나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기가 왔다. 민수는 참으로 순진했는데, 세상 물정을 몰라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적당한 대학교의 잉여되기 딱 좋은 학과의 졸업장과 780점의 토익 점수뿐이었다.​

반면, 그의 친구 우진이는 토익 980점에, 이런저런 자격증 그리고 인턴과 대외 활동 경험으로 무장해 취업 시장에 진출했다. 그는 당당히 싱그러운 나뭇잎을 탐할 자격이 있었고, 그렇게 했다. ​



다시 기린 이야기
한편, 낮은 목 기린이 취할 수 있는 파릇한 나뭇잎은 그다지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바닥에 떨어져 파삭하게 말라비틀어진 잎사귀에 만족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영양분 낮은 잎사귀를 먹기 위해서조차 하루에 8시간 이상을 목 빠져라 분투해야 했다. 자신의 목 길이를 탓해봐야 의미 따위 전혀 없었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 우연히 가여운 운명 타고난 낮은 목 기린에 잠시나마 애도를.

신기하게도, 인간 세상에서는 우연이라는 말이 그 단어가 마땅히 차지해야 할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우연이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쉽게, 자기 자신 안에서 우러러 나오는, 언제라도 무한히 솟아나는 자랑스러운, 마법과 결을 같이하는 결연한 자기 발생적 힘, 그러니까 노력과 의지라는 단어로 대체된다.


행동의 진화
다만 짧은 목 기린이 민수보다는 덜 불쌍한 게, 적어도 기린의 세상에서 비난과 멸시, 조롱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자아는 저 만만한 친구를 깎아내리고 짓밟기 위해, 그러면서 자신을 상대적으로 우수해 보이게 하기 위해, 비난과 멸시, 조롱 등의 행동과 함께 진화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잡놈을 사회의 병충해라는 이름 하에 간편히 꼬리 자르고, 그의 도태와 멸종 과정을 빈곤 포르노 삼기 위해)​


(굳이 세상 사람을 둘로 나누려면 평범한 사람과 특별한 사람으로 나누기보다는, 일반 사람과,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더 잔인한 사람으로 나눠야 할 텐데.)​


마지막 애원
다행히 민수는 몇몇의 짧은 목 기린처럼 자신의 생존 전략을 수립했다. 다만, 부디 민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지 말기를. 그랬다가는 무표정한 민수의 얼굴에서 잔인하게 고문당하며 죽어가는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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