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한 세계에서 우주적 관점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 우주생물학자 케일럽 샤프 -
‘좌뇌 해석기’와 기자, 그리고 작가로서 ‘나’의 강력한 스토리텔링 능력에 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이 이야기꾼의 힘이 세기는 해도, 뇌의 특정한 부분이나 기능이 더욱 ‘사용자’에 가깝다고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며,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나’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내 안의 장내 미생물도 나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고(우리 몸에는 우리 세포보다 더 많은 수의 박테리아가 살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주변 환경까지(직접 감각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넓게 보면 우주 전체를) 함께 고려해야 비로소 이 순간의 사용자 감각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며, 영화를 보듯 세상에 멀찍이 떨어진 전지적 관찰자의 시점을 취하려고 해도, 세계 그 자체와 우리를 분리할 수 없으며 언제라도 세계의 한가운데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양자 중력 루프 이론에 따르면, 우주 시공간 그 자체도 우리를 위한 무대이자 배경으로써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시공간 자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루프’라는 양자가 얽힌채로 요동하고, 상호작용 하면서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피어납니다.) 저 태양의 수소를 구성하는 전자와 내 몸에 있는 전자가 같고, 이 우주 전역에 작용하는 힘은 내 안에도 (나와 우주의 경계는 임의적으로 우리 마음이 그은 것. 좌뇌는 나와 너를 갈라버립니다) 똑같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두가 우주적 현상입니다.
색도, 맛도, 향도, 모든 것이 조금은 덧대어진 이야기입니다. 뇌의 조종석에 앉아 있는 ‘나’라는 책임자, ‘자아’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기억한다고 생각하는 과거 역시 소설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가 작동할 수 있는 근간이 되는 우리의 뇌, UI, 그리고 사용자라는 구분과 감각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UI의 시점에서, 여러 이야기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데닛에 의하면 ‘나’는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서사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나’라는 이야기와 함께 살아가야하며, 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만드느냐가 다른 모든 이야기를 바꾸는 힘이 됩니다.
데닛은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각, 문화적 다양성, 새로운 아이디어 등을 통해 자신의 내러티브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개방성은 자아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더 유연하고 적응력 있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손영호, <대니얼 데닛의 지혜를 통해 배우는 25가지 삶의 법칙>
‘나’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라도 계속해서 수정해갈 수 있습니다. (변치 않길 원해도 모든 것이 변해갑니다) 분명, 우리가 지금 어떤 이야기를 만드느냐에 따라 우리의 경험이 달라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도, 다가올 미래도 달라집니다.
뇌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주인공 자리에 ‘자아’를 앉힙니다. 하지만 ‘나’라는 이야기와 이미지로 구성된 ‘자아’는 ‘사용자’인 우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더 큰 무엇입니다. 그렇기에, 이야기와 실제를 구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한 호흡. 그것이 전부입니다. 다음은 크리스 나우바이어의 책 <자네 좌네에게 속았네>에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눈을 감고 딱 한 호흡만 의식적이 되어보라. 몸에 주의를 집중하고, 천천히 코를 통해 숨을 들이마신다. 허파에 가득 참을 느껴보라. 신선한 산소가 들어올 때 가슴과 배의 감각을 느껴보라. 그대로 1초 가량 숨을 참는다. 숨을 참는 동안 가슴에서 느껴지는 꽉 조임을 의식해보라. 주위와 당신 내면의 정적을 의식하라. 이제 숨을 천천히 내쉬되 입을 통해 일정하게 내쉬라. 단 한 번의 의식적인 호흡으로, 당신은 본래 자리로 돌아가 호흡과 하나가 된다. 단 한 번의 호흡으로 좌뇌의 판타지 속에서 헤매던 당신을 낚아채 진짜 세계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그 한 번의 호흡이 저절로 두 번, 세 번으로 늘어나더라도 놀랄 것은 없다. 우뇌는 지배적인 좌뇌 해석기에 가끔 훅하고 개입을 하기도 하는데, 뇌과학 박사 라마찬드란에 따르면 우뇌는 제어 장치다.”
나우바이어의 말에 따르면, 우뇌는 조용히 상황을 관찰하다가, 좌뇌가 만들어낸 이야기에서 깨어날 필요가 있을 때 신호를 보냅니다. 흥미롭게도 좌뇌는 이러한 전환과 그로 인해 얻은 ‘깨달음’을 자신의 공로로 여기며, ‘나 깨달았노라, 그리고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세상을 부분으로 조각내고 순차적인 인과로 해석하려는 좌뇌의 ‘해석 장치(ego)’인데, 사실상 문제의 원인이지 해결책이 아니다. 반면 우뇌는 자아가 없기에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으려 하지 않으며, 전체를 동시에 보고 은유를 즐기는 능력을 가진다. 따라서 삶에서 경험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좌뇌의 해석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우뇌의 개입으로 인한 것인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자유로운 흐름(동사) 속에서 순간순간 상황적 필요에 따라 ‘나’라는 허구의 캐릭터(명사)가 등장한다. 그러다가 생각이 미래와 과거를 오가며 수많은 캐릭터가 태어나고, 수많은 캐릭터를 인과의 풀로 일관성 있게 연결하려는 뇌의 자연스러운 시도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예측하고 대비하기 위해서) 인생이라는 이야기가 탄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사용자라는 것을 잊고 매순간,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구심점이 되는) 주인공 캐릭터, ‘나’에 몰입합니다.
모든 것은 변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애써 붙잡으려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여차하면 ‘나’라는 강력한 중력을 가진 관념에 끌려갑니다. 그 강력한 중력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뇌가 인과의 틀로 애써 이어붙이는 이야기’에 잘못 빠져들면, 우리는 영영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흘러가야 합니다. 자아는 흐름이지, 고정된 물리적 실체가 아닙니다. 삶과 사용자 감각 역시 모두요. 단일한 자아에 대한 착각, ‘나’라는 착각이 모든 불행과 갈등, 그리고 분열의 씨앗입니다.
+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구별짓지 말자고 하는데, 대체 구별하지 않는 것이 가능해? 너 설마 지금 구별한다와 구별하지 않는다를 구별하고 있는 거야? 차별하지 말자고 하는데, 너 지금 차별하는 사람은 나쁜 놈이라고 차별하는 사람과 차별하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고 있는 거야. “합리적인 구별짓기야” “정당한 차별이거든!” 에이, 좋은 게 좋은 거라니까 우리 그러지들 말자. 서로 너무 못되게 굴지 말자. 못되게 구는 친구도 마냥 미워하지는 말자.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은 배우를 미워할 필요는 없는 법이니까.
순식간에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 이야기에 좀먹히는 순진한 생물
- <우주를 위한 멜로디>, 에고이스트 -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한가?
생각과 행위의 99.9%는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정작 자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위무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