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보기 위해서”는 언뜻 명쾌해 보입니다. 이는 목적론적 사고(모든 현상 뒤에는 특정한 목적이 있다고 가정하는 경향)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진화의 원리를 알게 되면, 눈이 어떤 태초의 의도에 의해 계획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변화와 환경적 선택의 결과물로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일정한 흐름이나 패턴이 반복 관찰될 때,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기보다 ‘계획’이나 ‘의도’라고 역추론하곤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사건이 발생한 후 그 원인을 설명하려 하는 사후 인과적 해석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와 사후 인과적 해석은 자연의 복잡한 패턴 속에서 단순히 경향성을 넘어서 ‘의도’나 ‘목적’을 찾아내려는 인간의 깊은 사유 경향으로 이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우연을 인지하기보다 배후의 의도를 훨씬 더 빠르게 파악하도록 진화해 왔습니다. 먼 옛날, 수풀 속의 움직임이 단순한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해치려는 포식자의 움직임인지 판단해야 했을 때, ‘안전하다’고 가정하기보다는 ‘위험하다’고 믿는 편이 생존에 유리했습니다. 이러한 ‘의도성 편향’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빠르게 찾아내어 인지적 부담, 즉 인지 비용을 절감하려는 경향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사회와 문화가 주입하는 다양한 내러티브(이야기)들은 이러한 경향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촉매제가 됩니다.
이러한 사유 경향은 때로는 ‘종교’와 같은 숭고한 믿음 체계로 발전하기도 하고, 운이 나쁠 경우 ‘음모론’이라는 불안하고 위험한 해석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하지요.
인간의 패턴 인식 경향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실험이 있습니다. 가령, 네 방향에서 불빛이 임의로 점등되는 상황에서 다음 불빛이 어디서 나올지 예측하도록 하는 실험을 가정해 봅시다. 한 실험에서 80%의 확률로 위쪽 방향에서 불빛이 점등되고, 나머지 20%는 다른 세 방향에서 무작위로 점등되었습니다. 인간 피실험자들은 처음에는 ‘위쪽’에만 집중하기보다 전체적인 패턴을 찾으려 애쓰며, 결국 60% 정도의 정답률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같은 조건에서 ‘쥐’에게 실험을 하면, 쥐들은 복잡한 패턴을 찾으려 하지 않고, 곧바로 가장 높은 확률인 ‘위쪽’에만 집중합니다. 그렇게 쥐들은 80%에 가까운 정답률을 기록하게 됩니다. 인간은 패턴을 찾으려다 실제 확률론적 우위를 놓치는 역설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뛰어난 인지 능력이 때로는 최적의 결과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특히 ‘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숫자나 상황에서 더욱더 패턴을 찾으려는 강한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은 우리를 더 깊은 패턴 탐색으로 이끕니다. 또한, 도파민 수치가 높을수록, 또는 우리의 목숨이 위협받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할수록 우리는 주변 환경에서 더 많은 패턴과 연관성을 찾아내려 합니다. 비상 상황에서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한 인지적 기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연구 결과들은 자기 존재의 이유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지인과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거나, 애국심과 같은 집단적 소속감을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또 영적인 방식으로 내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이 복잡한 경험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좌뇌 해석기이자 ‘패턴 인식기’입니다. 패턴 인식기가 만들어낸 ‘나’라는 패턴이 위협받거나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면, 패턴 인식기의 감도는 높아져서 훨씬 더 많은 패턴과 연결고리(풍부한 의미)를 찾고 인식하게 됩니다. 위협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 기제이자 반작용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패턴 인식기의 감도가 너무 낮아지면, 우리 주변의 의미 있는 패턴이나 연관성을 전혀 찾아내지 못하게 되어 무기력감과 우울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파편화되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이 ‘해석기의 감도’를 조금 더 낮출 수 있다면, 우울감조차도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패턴 인식기’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패턴 인식기가 곧 ‘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크리스 나우바이어가 제시하는 몇 가지 연습과 인식의 전환을 통해 그 감도는 조절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패턴들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 뇌의 복잡한 작용과 외부 환경이 빚어낸 하나의 해석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마터면 깨달을 뻔’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 나우바이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석기를 알아차리는 것은 또다시 해석기이며, 이것은 우리가 나아졌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지만, 그것까지도 단지 더 큰 에고일 뿐이다. 에고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에고를 취하려는 영적 우월감을 조심해라. ‘에고’라는 것은 애초부터 실체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에고적 해석뿐이다.” “에고적 마음을 찾으려는 시도는 마치 달리기 선수가 멈추어 서서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제몸을 더듬어 ‘달리기’라는 것을 찾으려 애쓰는 것과 같다. 우리는 분별하는 중에만 ‘에고’를 찾을 수 있다.”
* 위의 글은 Telosona님의 쓰레드 글과 나우바이어의 <하마터면 깨달을 뻔>을 참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