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우리는 놀이를 하고 있다

by 밈바이러스

우리는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에게 몰입해 빠져들기도 하지만 중간에 ‘아, 이건 그냥 드라마구나’하고 이야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드라마를 재미나게 감상하고 있는데, 친구가 “야, 그거 드라마일 뿐이야. 과몰입하지 마!”하면 흥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친구의 흥 깨기마저도 우리 인생이라는 드라마의 일부라는 점입니다.


크리스 나우바이어는 그의 아들과 괴물 놀이를 합니다. 그가 괴물이 되고 아이가 도망가죠. 하지만 아이는 아빠가 못 잡을 정도로 빨리 도망가지는 않습니다. 아빠가 뒤에서 와락 붙잡으면 아이는 깔깔대며 “제발 나를 놔주세요. (그렇지만 진짜로 놓아주지는 마세요!)” 게임으로 이어집니다.


아이들은 놀이는 무섭지만 안전하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놀이의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어른이 되면 괴물들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무섭게 다가옵니다. (돈 문제, 직업 문제, 외로움, 병, 죽음 등) 우리는 이런 괴물들과의 싸움을 진짜라고 믿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원래는 즐거운 놀이였던 것이 심각한 현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불안해하는 것도 놀이. 우리 드라마의 일부

놀이란 진짜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보는 겁니다. 우리가 매 순간 이런저런 캐릭터를 만들고 연기하며 울고 웃고 있는 것도 어쩌면 놀이가 아닐까요? 크리스 나우바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주는 고정적이고 딱딱한 곳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해가는 장난기 넘치는 곳이다”, “우주가 가장 익살스러운 순간은 우주 스스로가 세상 진지한 척할 때다”.


하지만 우리는 병들고, 늙고, 죽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비극적인 순간들마저도 놀이의 일부인 걸까요?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유한성을 알아차리는 일이라 분명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 슬픔은 ‘나’라는 이야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데서 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 영원히 명사로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우주는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어 흘러가고, 내 몸도 잠시 만들어졌다가 금세 흩어져 다른 것을 이루게 됩니다.


마치 구름과도 같습니다. 비를 내리게 하고 흩어져 사라진 뒤, 어느새 다시 모이는 구름요. 잡아보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우리는 모든 것이 순간적(우주의 관점에서 우리의 시간은 정말 찰나지요)이고 본질이라고 할 만한 고정적인 것이 없는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어가는 우주적 드라마의 일부입니다. 앨런 와츠의 말을 빌리면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우주가 놀이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이 되어보는 놀이이며,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우주 자체가 자신의 형태를 자유로이 바꿔가며 놀고 있는데, 그 놀이의 한 부분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삶이라는 드라마의 형태로 우주의 놀이적 본성, 장난스러운 본성을 체험하고 있는 거예요.


“우주라는 일체(oneness)가 놀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한성을 잊어버려야 한다. 놀이를 즐기는데 자신이 전지전능한 불사의 존재라는 사실은 거추장스러운 방해 요소다(크리스 나우바이어).” 우리 사용자 역시 죽음을 강렬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놀이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진짜 같아 보이지 않으면 누구도 게임에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을 겁니다. 친구와 둘이서 격투 게임을 하는데, 제 캐릭터의 체력만 줄어들지 않는 치트가 적용되어 있다고 하면 저는 도저히 게임을 즐길 자신이 없습니다.


한 꼬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 모든 무서운 것들은 분명 무서운 척하는 걸 거야!” 죽음이라는 것 또한 우주가 자신의 형태를 계속 바꾸어가는 놀이 과정의 일부이며, 사실은 그렇게 무서워해야 할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액스맨 이야기: 불안의 원천은 ‘나’ 자신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도 결국 놀이, 우리 드라마의 일부입니다. 나 자신이 불안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불안의 원천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크리스 나우바이어의 ‘액스맨’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책, <하마터면 깨달을 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한 죄수와 그를 감시하는 가면 쓴 남자가 있습니다. 가면을 쓴 남자는 매일같이 죄수의 목에 도끼를 갖다 대서 서늘한 죽음의 감각을 느끼게 한 뒤 그냥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죄수는 오늘이 바로 처형되는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립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죄수는 도끼 든 남자의 가면을 잡아채어 벗겨버리는데, 거기서 나타난 얼굴은 바로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 순간 감방의 벽은 쭈그러들어 없어지고 죄수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러나 밖으로 한 발을 디디는 순간 새로운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감방 밖에 엑스맨보다 더 무섭고 현실적인 존재가 있으면 어떡하지?’ 그는 자신이 상황을 예전으로 돌려놓기를 간절히 바라는 새로운 죄수가 되었을 뿐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우리의 적은 우주도, 죽음도 아닌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생각과 ‘자아’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무서운 적을 상상해 자신과 삶을 불안과 공포 속에 가둬놓고, 그렇게 목숨을 보존하며 인생이라는 게임을 이어가고 있는 것일지도요. 자신과 자신이 벌이는 상상 속의 술래잡기, 그리고 액스맨 이야기의 죄수와 가면 쓴 남자.


이런 내면의 놀이(자아의 술래잡기)가 없다면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모든 갈등과 서사 구조, 이야기와 게임이 성립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라는 것에 집착할수록 죽음을 포함한 우주적 공포나 사회적 현실이라는 공포가 거대하고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이 놀이를 누구보다 더 잘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책 <싯다르타>에서 주인공 싯다르타는 죽어야 한다는 강박과 피로 속에 잠들었다 깨어납니다. 세상 개운하게 잠을 자고 일어난 그는 자연의 모든 것을 다시금 싱그럽고 생생하게 받아들이는데요. 싯다르타는 자신이 지난 번에 했던 생각(죽음이 나를 끝장내주기를)을 우습게 여기면서도 껴안아줍니다.

싯다르타는 삶과 우주의 모든 면을 수용하고, 과도한 진지함에서 벗어나는 성숙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잠시 우리의 몸의 형태를 갖춘 우주가 우리 몸을 빌어서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 ‘나’라는 이야기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더 사랑하고, 삶을 더 잘 즐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희극은 비극보다 언제나 성숙하다. 비장한 어조로, 모든 것에 막중한 의미를 부여하며, 세상의 부조리를 홀로 짊어진 듯 괴로워하는 사람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사람은 없다. 그런 과잉된 진지함은 대개 체험의 부족과 과열된 자의식에서 온다.

- <은둔기계>, 김홍중




모든 것은 연결되어 흐른다: 무아와 상호의존성

로버트 커즈번에 따르면, 두 가지 무아 체험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면적 무아 체험으로,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목소리, 감정)이 ‘나’라는 직관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외면적 무아 체험으로, 내 밖에 있는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는 직관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내면적 무아 체험은 우리가 계속해서 해왔던 것입니다. 목소리와 이야기, 감정 그 자체가 나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외면적 무아 체험은 어떤 것일까요? 구름은 스스로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기온 습도 등 여러 조건이 어우러져 변해갑니다. 그러니까 외면적 무아 체험은 ‘나’ 밖에 있는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는 직관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으면서 모든 것이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상호연결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분은 장내 미생물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어디까지가 다른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나’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6단계 분리 이론에 따르면 6번의 다리를 거치면 지구 상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도 계속해서 외부의 것과 교체됩니다. (우리 몸에는 한때 셰익스피어에게 속했던 원자가 10억 개도 넘게 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지구의 모든 생물은 태양 에너지에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식물이 태양 빛을 광합성해서 만들어내는 산소와 포도당이 모든 순환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식물과 동물을 먹고, 우리가 먹은 것들이 소화되고 분해되어 우리 몸을 이룹니다. 우리의 모든 숨(그리고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방귀나 다른 모든 것도)은 순환합니다.


“나무나 풀, 산이나 강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우리도 이 순간 우주에서 자신의 역할을 합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이어져 있지요. 불교에서는 서로가 인연을 맺고 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갑자기 뚝 사라진다면 이 우주는 무엇인가 이상하고 슬픈 곳이 되어버릴 겁니다.


이 우주에서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상호 연결된 세계에서 자신만을 똑 떼어낼 수 없으며, 세계 한가운데에 머물러야 합니다. 2차원 세계를 통째로 파악하려면 3차원에 올라서야 합니다. 우주를 완전히 기술하려면 우주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조망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울프 다니엘손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우주 한가운데에 서 있으며, 필멸하는 몸에 갇혔지만, 불완전한 뇌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관찰을 표현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는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세계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안으로부터 세계를 연구하며 우리가 세계의 일부임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세계란 우리에 있어 하나의 만남, 하나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자연 사물들의 형제이지, 재판관이 아닙니다. 앎은 세계를 초탈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한 구성 요소입니다. 우리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부입니다.

-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뇌의 연출: 미지의 블랙박스

뇌의 목표는 항상성을 유지하면서 주변 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것에 있지, 자신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뇌는 주변의 거친 감각 데이터와 내수용 감각 데이터, 자체적인 기억 정보를 통합하고 세공해서 매끄러운 의식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뇌는 완전히 새까만 블랙박스입니다. 뇌 안에서 하필 어떤 뉴런이 왜 건드려졌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온전히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경과학은 다양한 인과관계를 파악해보려 하지만, 수많은 제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하는 수고는 뇌가 하면 되고, 우리 사용자는 ‘나’라는 캐릭터가 되어보는 놀이를 하며 맛과 색, 향이 덧씌워진 감미로운 선율이 울려 퍼지는 우주를 즐기면 됩니다. 재미나지 않나요?*


보통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그런데 불교 수행을 하다 보면,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해요(내가 알던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혼란기를 넘어서면,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깊이와 의미를 가지고 볼 수 있게 된답니다. 즉, 세상의 본질이 ‘놀이’이고 ‘게임’임을 깨닫더라도, 결국 우리는 다시 우리의 삶 속으로 돌아와 몰입하며, 괴로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더 넓고 깊게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당신이 친구와 대화하면서 계단을 오를 때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십 가지 미세조정에 관한 계산을 어떻게 하는지, 당신의 혀가 어떻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정확한 발음을 산출하는지 당신은 전혀 모른다.” - 데이비드 이글먼


게임의 0번째 규칙: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게 하라!

이제 게임의 0번째 규칙을 공개합니다. “절대로 이것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라!” 왜냐하면, 삶이 그저 게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면 플레이어의 흥이 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주와 뇌는 우리가 이것이 단순히 놀이이고 게임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몰입감을 줍니다.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나’라는 캐릭터를 즐기면 됩니다. 하지만 앞으로 찾아올 나의 수많은 캐릭터, 그리고 이번 판을 함께할 주변의 다른 캐릭터에게 조금 더 그윽한 애정을 가지고요.


수많은 문화권의 동화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이야기 패턴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시무시한 적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우리 모두 친구였다는 이야기. 불안이라는 망령과 죽음이라는 악마를 불러놓고 차 한 잔 어떤가요? 눈 비비고 바르게 보면 사실 우리 모두가 친구일지도 모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도깨비와 요정 비유를 빌려왔습니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삶이라는 여인의 얼굴에 추악한 가면을 씌워놓았는가?” 바로 우리들이 씌워놓았습니다. (그것도 기꺼이) 하지만 추악한 가면을 봐도 이제는 웃음이 납니다. 우리의 적은 우주도 죽음도 아닌, 우리가 게임을 계속하도록 하는 ‘나’라는 에고적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우리의 ‘에고 게임’은 이어질 것입니다. 언제라도 그랬듯이요. 인간적인 마음으로 봤을 때, 인생은 새드 엔딩 코미디라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사람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무척이나 슬픈 일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니까 웃을 수밖에요.


(불교에서는 만사 모든 것이 맞물려 한 치 어긋남 없이 ‘연기(緣起, 상호작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커다란 흐름을 깨달았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거나, 별달리 해야할 일은 없습니다. 그저 계속 살면 됩니다.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은 이미 벌어져 온 일입니다.)



“강은 흐름을 바꾸려는 욕심도,

흐름을 바꾸는 힘도 내지 않는다.

모든 자연은 있는 그대로 위대하다.”

- 테즈카 오사무, <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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