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자기계발과 자기분열의 시놉시스

by 밈바이러스
성찰의 빛에 드러나는 자아는 종종 괴물성을 띤다. 자기를 징벌하려는 욕망은 자기를 보존하려는 욕망을 숨기고 있다. 자아의 긴 역사는 처벌받으며 보존되어온 괴물의 역사다.
- <은둔기계>, 김홍중


우리의 에고(‘자아’)는 우쭐한 일(자기 홍보)이 있을 때와, 불평불만이 있을 때 득세합니다. 사람들이 많아 혼잡할 때는 “어우, 사람이 너무 많네!”라고 불평합니다. 좌뇌는 불평과 함께 ‘지금 여기’에 반대되는 뭔가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조금 적어서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곳이 한산하고 쾌적했으면 합니다. 그런데, 모든 불평은 현실의 반대극입니다. 불평은 현실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믿음을 낳습니다. (사람이 적어야 하는데, 많아서 깝깝하네!) 그래서 불평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조금 우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이 더 나은 곳이기를 바랍니다. 불평불만은 세상을 향하기도 하지만, 자신을 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자기계발을 합니다.


* 제가 항상 생각하는데,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그 수많은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자기계발: 세 캐릭터가 펼치는 즉흥극

제가 보는 자기계발은 이렇습니다. 우리 안의 모듈들이 협력하고 경쟁하며 써내려 가는 한 편의 즉흥 꽁트. 이 극에는 세 명의 주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물론 모든 자기계발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의식하지 않아도 변화는 일어납니다만, 자기계발을 직접 기획할 때에는 다음 과정을 거치는 듯싶습니다.)

볼품없는 나: 현재의 ‘나’입니다. 불평불만이 많고 만족할 줄 모르는 모듈이 만들어내는 결함이 있는 존재이자, 끊임없이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미완의 존재로 설정됩니다.


개선된 버전의 자랑스러운 나: 미래의 ‘나’입니다. 장기적 관점을 취하는 모듈이 지지하며, 자기계발의 궁극적 목표이자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자기 홍보를 하는 언론부가 좋아할 캐릭터입니다.

결정권자로서의 나: ‘관찰한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판단하며, ‘나’ 사이의 갈등을 조율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조종사이자 결정권자라고 생각하는 ‘나’입니다. 메타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괴물성을 띠는 나에게 성찰을 빛을 비추는, 보다 고차원적이고 선한 ‘진짜 나’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자기계발이고 자기 통제라니, 도대체 자기계발에서 이익을 보는 ‘자기’는 누구고, 통제하는 ‘자기’는 또 누구일까요? 여기서 이익을 보는 ‘자기’는 ‘미래의 나’라는 캐릭터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듈들입니다. 그리고 통제하는 ‘자기’는 ‘확고부동한 나’라는 관념이 만들어낸 조종사이자 판사 캐릭터에 가깝죠. 이 모든 것은 뇌가 만들어내는 정교한 이야기입니다. (기든스가 말하듯, 성찰성은 근대적 주체성의 ‘일반적’ 구성 요소입니다.)



당신이 편안한 소파에 앉아서도 평화로울 수 없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 인간은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오히려 불행해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못하는 유일한 종이다.

- <하마터면 깨달을 뻔>, 크리스 나우바이어


딱 이 순간만 놓고 봤을 때, 육체적인 통증이 없다면 이 세계는 제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파스칼이 지적하듯,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방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함에서 나옵니다. 일단 자아는 지루해하면서 지루함을 해소하고자 문제를 벌려놓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또는 불안해하면서, 불안을 해소할 방법을 찾습니다. 우리는 불안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불안이 없는 것이 불안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우바이어는 “자아는 딱 문제를 벌려 놓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까지가 자아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회전목마보다 롤러코스터를 좋아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보다는 <어벤져스>를 좋아합니다. 자극과 갈등이 있는 서사 구조를 좋아합니다. 타노스가 나오지 않는 <어벤져스>는 분명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불평은 현실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믿음을 낳고, 우리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개선’이라는 서사를 써내려 갑니다. 우리에게는 나쁜 놈, 빌런이 필요 합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돈, 행복, 자유) 갖도록 가로막는 놈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놈이 없는 세상은 끔찍합니다. 나를 가로막는 놈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보다 더 나아질 구석이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은 나를 살살 긁는 익명 커뮤니티 유저일 수도 있고, 세계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게으르고 못난 자기계발이 필요한 나를 적으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우리 뇌는 세상을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놓고, 자신마저 분열시켜 더 많은 것을 얻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크리스 나우바이어는 무적의 대립성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더 많은 것을 추구하면 더 적은 것을 얻게 됩니다. 행복을 오해하고 잘못 추구하면, 한 계단 올라가려는 시도가, 한 계단 내려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성공한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후에 포장되어 평범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분열: 양날의 칼, 언어

언어는 모든 것을 갈라버리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세상을 ‘이것’과 ‘저것’으로 마구 가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우리 안에 있는 것들마저 갈라버립니다. ‘자아’를 여러 캐릭터로 나누는 등 자기 자신마저 분열시켜버립니다.


밖의 사물을 보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구분하듯이, 우리는 내면을 들여다보며 ‘나’를 분류합니다. ‘관찰하는 자아’와 ‘관찰되는 자아’, ‘관리하는 자아’와 ‘관리당하는 자아’, 심지어 ‘사랑받아 마땅한 자아’와 ‘처벌받아야 할 자아’까지 수많은 ‘나’를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자아’들 중에서 어떤 자아가 진짜일까요? 놀랍게도, 그 무엇도 진짜가 아닙니다. 우리의 ‘A를 선택한 나’와 ‘B를 선택할 수 있었던 나’라는 이야기는 ‘이 우주 저 우주’라는 이야기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매 선택 분기마다 우주가 여러 개로 갈라진다는 이야기요. 우리 해석기의 이야기 창작 능력은 이처럼 어마어마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좌뇌를 거쳐 생성된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 것.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보다 더 큰 무엇임을 기억할 것.




‘다중 초안 모델’을 이해함으로써 나를 안아주기

우리는 보통 ‘나’라는 사람이 딱 하나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데닛의 ‘다중 초안 모델’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마치 작가가 글을 쓸 때 여러 ‘초안’을 동시에 만들고 계속 수정하는 것처럼, 우리 뇌도 수많은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나’에 대한 여러 버전의 초안을 계속해서 만듭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고 경험하는 ‘나’는 그 많은 초안 중에서 뇌가 그 순간에 선택해서 보여주는 ‘공식 입장’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건, 이 과정을 통제하는 ‘중앙 편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뇌 속의 정보들이 마치 선거나 오디션처럼 경쟁하고 선택되는 과정(앞서 살펴봤던 모듈들의 의회처럼), 그리고 동시에 특정 정보나 표상이 뇌에서 반향되고 울려 퍼지면서 광역적으로 우세하게 되는 과정에서 의식이 피어납니다(데닛의 ‘환상의 메아리 이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라는 내러티브가 충분히 광역적으로 가용 가능한 것이 되면, 자의식이 싹트는 것입니다.


이 모델을 이해하면, ’나’라는 사람은 고정된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뇌 속 수많은 생각, 감정, 역할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현상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다양한 측면, 심지어 모순되는 측면까지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면, ‘나는 왜 이랬다가 저랬다 하지?’ 하는 불안 대신, ‘아, 나는 여러 가지 면을 가진 존재구나!’하며 자신을(그리고 상대를) 더 넓게 품어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 생각, 기억들은 여러 수준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일 때도, ‘이건 내 마음의 한 부분일 뿐, 다른 부분들도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균형 있게 감정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침 그 부정적인 감정이 다른 감정을 제치고 왠지 우세해졌을 뿐이라는 것이죠.

데닛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우리가 의도적인 훈련을 통해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정신적인 구조물입니다. 명상, 글쓰기, 성찰 같은 방법을 통해 마음의 패턴을 바꾸고, 더욱 유연하고 적응력 있는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 꺾이지 않는 나무는 단단한 나무가 아닙니다. 바람 따라 휘는 나무가 살아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 할 것이 아닙니다. 삶의 여러 측면과 다양한 관점을 포용할 수 있는 풍부한 내러티브를 발전시킴으로써 ‘나’를 구성해가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정원(마음)을 가꿉니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꽃들을 발견하고 내가 좋아하는 꽃들로 자신의 다채로운 정원을 꾸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잡초는 조금씩 솎아내면서요.


“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초안들의 집합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모두를 더 깊이 안아주고, 꺾이지 않고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잠시 꺾였다고 해도 푹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면 되지요.


긍정할 게 전부, 나를 나로 만드는 모든 요소를

좋아해 전부, ‘너’라고 하는 내 어두운 부분도

- <らしさ(나다움)>, Official髭男dism



+ 자기파괴의 시놉시스

내가 이 세상은 어찌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 몸뚱어리만큼은 내 멋대로 하겠다는 아주 협소한 의미의 뒤틀리고 왜곡된 자유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자유. 무엇보다 그 감각이 전부. 이 세상에 자그마한 흠집이라도 내는 것보다, 자신을 통째로 파괴하는 편이 몇 배나 더 간편한 길임을 깨닫고.


미래가 불안하고, 자기 자신이 의심스러운 나머지,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리도록 바라보고만 있기도 한다. 젊음같이 귀중한 것을 ‘기꺼이’ 낭비해 버리는 것은 쾌감으로 가득 찬 일이었기에.

-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사람이 인생의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인생을 내던져야한다.

- 카렐 차파크, <평범한 인생>


세상에는 너무나도 소중해서,

(역설적으로) 너무 소중히 하면 탈나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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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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